[뉴스룸/홍수영]더이상 ‘대통령 시계’를 서랍장에 넣고 싶지 않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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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영 정치부 기자
홍수영 정치부 기자
자유한국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에서 전사한 용사의 노모를 만난 일화를 전해줬다. 노모는 손목을 내보이며 자랑을 하더란다. 일명 ‘이니 시계’라 불리는 ‘문재인 대통령 기념 손목시계’였다. 추석 직전 전사·순직자 유가족 초청 청와대 오찬에서 받은 것이다. 노모는 “국회의원들도 안 가진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며 웃었다고 한다. “북한에 퍼주기만 안 하면 좋겠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문 대통령이 참 잘한다”고도 했다. 노모는 시계 하나로 아들을 잃은 아픔을 잠시나마 위로받았을지 모른다.

대통령 시계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 반지처럼 ‘절대 시계’다. 제작 단가는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의 선물 한도(5만 원)를 넘지 않는 4만 원 수준이다. 하지만 시계 앞면에 새겨진 대통령 친필 사인과 봉황 문양 때문에 ‘명품 시계’가 부럽지 않은 묘한 힘이 있다. 이 시계를 차기만 하면 누구나 대통령과 가까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당 의원들은 시계로 ‘힘 있는 의원’ 행세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야당 의원들도 하나 얻으려고 청와대에 알음알음 민원을 한다. 지역민들이 “우리도 대통령 시계 좀 보자”면 도리가 없다.


대통령 시계만큼 정권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물건도 없다. ‘박근혜 시계’를 두고 빚어진 각종 논란은 박근혜 정권의 축소판이었다. 취임 후 1년도 안 된 2014년 1월에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청와대가 당시 여당의 원외 당협위원장에게 시계를 다섯 쌍씩 돌려 구설에 올랐다. 당 사무총장이던 친박(친박근혜)계 홍문종 의원은 “잘 활용하셨으면 좋겠다”는 발언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예산으로 제작한 대통령 시계를 여권의 선거 전략에 활용한다는 야권의 공격이 빗발쳤다. 박 전 대통령 인기가 좋았을 때 일이다.

박 전 대통령의 시계 인심이 박해 여당에선 원성도 자자했다. 2015년 8월 모처럼의 청와대 오찬 직후 여당 의원들의 분위기가 싸했다. 알아보니 오찬장에서 늦게 나온 이들만 종이가방을 하나씩 챙겼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의전’ 실수였지만 못 받은 의원들은 뿔이 났다. 그러나 그 귀했던 ‘박근혜 시계’도 찬밥 신세가 되는 순간이 왔다. 이듬해 20대 총선을 마친 뒤부터다. 한 친박 의원이 “얼마 전 ‘박근혜 시계’를 세 쌍이나 받았지만 곧장 서랍장에 넣었다”고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시계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

지난달 22일 한 바자회에서 ‘문재인 시계’ 한 쌍이 420만 원에 낙찰됐다. 정권이 출범한 지 6개월, ‘문재인 시계’뿐만 아니라 ‘문재인 우표’ ‘문재인 책’ 등 ‘이니 굿즈’가 두루 인기다. 그간 우리 역사에는 쓰린 진실이 있었다. 역대 어느 대통령의 시계도 ‘절대 시계’에서 ‘서랍장 시계’를 거쳐 ‘휴지통 시계’로 몰락하는 과정을 피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꼭 국정 농단 사태가 아니었대도 대통령 5년 단임제의 한계이기도 했다. ‘이니 굿즈’에 대한 열광에는 이 같은 불행한 ‘대통령 역사’를 끊고 싶은 국민의 바람이 투영됐을 테다.

한국당 관계자는 제2연평해전 유가족이 안보를 강조해 온 자신들보다 문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면서 당장 씁쓸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모가 ‘문재인 시계’를 정권 말까지 소중히 차고 다니시면 좋겠다. 더불어 ‘성공한 대통령’을 갖고 싶어 하는 국민의 바람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을 집권 세력이 잊지 않으면 한다.
 
홍수영 정치부 기자 gaea@donga.com
#자유한국당#제2연평해전 유가족#문재인 대통령 기념 손목시계#이니 굿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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