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신뢰라는 이름의 전차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2일 03시 00분


코멘트
정양환 문화부 기자
정양환 문화부 기자
“축하는 드리지만, (방송에선) 안 봤으면 좋겠어요.”

지금껏 봤던 가장 묘한 댓글이 아닌가 싶다. 짧은 문장 한 줄에 이토록 섬뜩하게 벼린 ‘정색’이 담겨 있다니. 그것도 높임말로. 싫어도 정말 싫나 보다.

기사는 별것 아니었다. 연예인 S 씨가 득남했다는 소식. 경사스러운 일인데 반응은 쌩하니 찬바람이 분다. 그래도 우리나라 누리꾼들, 기본 예의는 차린다. 대다수가 산모와 아이는 건드리지 않았다. 건강하길 빌어준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알 사람은 다 안다. S 씨는 참 오랜만에 연예계로 돌아왔다. 원정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킨 지 7년 만.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바뀌었건만. 여전히 그에겐 줄기차게 따라붙는 단어가 있다. ‘뎅기열.’

어쩌면 S 씨는 섭섭할 수 있겠다. 그렇게 긴 세월을 자숙했건만. 사고 친 연예인이 어디 한둘인가. 도박은 물론 음주운전, 약물복용, 병역의혹 등 다양한 ‘빨간 줄’이 그이고도 버젓이 활동하는 이가 수두룩 빽빽하다. 뭐, 연예인 범죄율이 일반인보다 높은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에게 ‘직장 복귀’의 문은 일반인에 비해 확실히 좁지 않다.

그런데 왜 유독 S 씨에겐 이리도 엄격할까. 처음이 아니란 점도 한 가지 이유일 터.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이 식어버린 까닭이 있다. 바로 ‘거짓말’이다. “해외여행을 하다 뎅기열에 걸려 입원했다”며 공개했던 한 장의 사진. 두고두고 회자되며 굵고 질긴 멍에가 됐다.

실제로 대중이 마음을 돌린 사례를 보자. 사건사고의 경중보단 진실성 여부에서 판가름 나는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에 가야 한다”고 수차례 말해 놓고 정작 미국으로 가버렸던 Y 씨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던 K 씨 등등. 그 어이없던 ‘눈 가리고 아웅’이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갔다. 한마디로, 상호 간의 신뢰가 깨진 것이다.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양치기소년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잠깐 어쭙잖지만 아는 척 좀 하련다.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년)이란 책이 있다. 여기엔 수사슴과 토끼의 딜레마란 게 나온다. 사냥꾼 2명이 힘을 합쳐 수사슴을 사냥할지, 각자 손쉽게 토끼를 잡으러 갈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학자들은 거창하게 “집단행동의 큰 보상과 개인주의의 작은 보상 사이의 선택”이라 부른다. 인간은 대체로 수사슴으로 기우는데,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다. 상대가 고기를 나눌 거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신뢰는 인류든 동물이든 본능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사자 무리가 포획물을 공유한단 믿음이 없다면 뭐하려고 함께 사냥에 나서겠나. 영장류는 더 민감하다. 침팬지가 사육사에게 가장 크게 화를 내는 순간은 다른 침팬지에게 더 좋은 먹이를 줬을 때다. 공정하거나 공평할 거란 상호 신뢰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수많은 부모들은 자식에게 “거짓말은 나쁘다”고 가르친다. 실은 본인들도 꽤나 했을 텐데도. 어쩌면 그건 무의식적으로 사회 구성원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생존 방식을 일러주는 게 아닐까. 한 번 어그러지면 무척이나 회복이 어렵다는 걸 알기에.

살다 보면 기차는 놓칠 수 있다. 그러나 되돌아오진 않는다. 시간을 놓치고 티켓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건 승객들이 아니다. 게다가 다음 열차는 같은 행선지로 가리란 보장도 없다. 무섭지만 그게 삶이다.

정양환 문화부 기자 ray@donga.com
#뎅기열#연예인#거짓말#장자크 루소#인간 불평등 기원론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