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승헌]가족이라도 출석하면 달라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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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1. 이달 4일 애슈턴 카터 미국 신임 국방장관 후보자 상원 군사위원회 인사청문회장. 댄 설리번 공화당 상원의원이 질의를 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후보자가 보여준 국가에 대한 헌신에 감사드린다. 특히 후보자의 부인과 자녀들, 이 자리까지 오느라 (검증 과정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잘 안다. 후보자보다 더 힘들었을 텐데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린다.”

후보자 뒤에는 부인과 전처에게서 얻은 아들딸이 앉아 있었다. 가족들이 원할 경우 청문회에 참석하도록 하는 의회 전통에 따른 것이다.

설리번 의원은 가족에 대한 감사 인사 후 미사일방어(MD)체계 등 군사 현안에 대한 질의를 이어갔다.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이슬람국가(IS)’ 대응 전략을 비판했으나 고성 대신 논리 싸움이 이어졌다. 가족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2. 지난달 28일 미 흑인 여성 최초 법무장관 후보자인 로레타 린치에 대한 상원 법제사법위원회 청문회장. 린치 후보자 뒤에도 역시 가족들이 있었다. 아버지 로렌조 씨, 남편 하그로브 씨 등이 자리를 내내 지켰고 린치 후보자는 청문회 도중 “목사인 아버지의 어깨 너머 세상을 보고 배웠다”며 자신의 성장 과정을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최근 워싱턴에서 지켜본 두 건의 인사청문회 장면이 떠오른 것은 10, 11일 열린 이완구 국무총리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멀리 미국에서 인터넷 생중계로 본 이 총리 후보 청문회는 이전 청문회들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신상 검증과 정책 검증이라는 청문회의 두 가지 기능 중 한 가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최대 쟁점이던 ‘언론 녹취록’ 파문도 여야 간 고성에 파묻혀 유야무야됐다.

미국은 우리와 무엇이 다를까 생각하다가 미국의 경우 후보자 가족이 청문회에 참석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후보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가족들이 있어 청문회가 비교적 차분하고 진지하게 진행되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은 연방수사국(FBI) 등이 후보자의 신상 검증을 미리 하기 때문에 청문회는 주로 정책 검증 위주로 진행되지만, 아무래도 후보자 가족이 지켜보니 여야를 떠나 최소한의 격을 지키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우리도 후보자의 가족을 출석시키면 어떨까.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정치인이더라도 가족이 보는 앞이라면 후보자에게 필요 이상의 인신공격을 삼가고 청문회를 파행시키는 일이 약간이라도 줄지 않을까. 가족 중에 병역 등 의혹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청문회장에서 즉석 해명을 하거나 제대로 밝혀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불필요한 공방이 줄어 정책 검증에 할애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제안도 물론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0년 도입돼 16년째를 맞는 한국의 청문회 문화는 당장 뭐라도 해야지 그냥 놔두기엔 너무 창피한 수준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수준의 청문회를 워낙 자주 접하다 보니 국민들이 “또 그런가보다”는 식의 정치적 면역 같은 게 생길 수도 있고, 코미디 같은 장면이 많으니까 ‘욕하면서 보는’ 일회성 막장 드라마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청문회가 반복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국민의 정치 혐오만 쌓이고 한국 정치의 격은 계속 추락할 뿐이다. 국회 차원에서 청문회혁신특위라도 만들어 미국이든 다른 나라든 사례 연구부터 해봤으면 좋겠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
#후보자 가족#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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