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창덕]남극 월동대장의 극한 리더십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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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덕 산업부 기자
김창덕 산업부 기자
윤호일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극지연구소 부소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6월 초 남극 킹조지 섬 세종과학기지에서였다. 2003년 12월 전재규 대원이 고무보트 전복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세종기지 월동대장이 윤 부소장이었다.

기지에 도착한 지 몇 시간이 지나서야 사고에 관한 질문을 어렵사리 꺼낼 수 있었다. 대원들이 겪었던 사흘간의 사투에 대해 그는 힘겹게 설명을 이어갔다. 대원 15명 중 8명이 차디찬 남극 바다에 빠졌다. 1명은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고개를 든 채 애써 삼키던 남자의 눈물이 아직도 생생하다. 후배를 떠나보낸 선배의 자책감과 위기에 빠진 기지를 정상화해야 했던 리더로서의 고민이 얼마나 컸을까.

윤 부소장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지난해 12월 17일 삼성그룹 수요사장단 회의에 강연자로 초청됐다는 소식을 접한 뒤였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에서 “극한의 현장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위기 시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지 강연해 달라”고 부탁해 왔다고 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병상에 누워 있는 데다 승승장구하던 삼성전자 실적마저 꺾이면서 그룹 전체가 위기감에 휩싸인 삼성으로선 맞춤형 강연이었다.

전화기로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이내 ‘위기’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윤 부소장은 위기 속 리더십이란 한마디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지금이 위기”라고 흔히 말할 수 있지만 지금이 최악의 상황임을 인정하는 건 어렵다는 것이다.

“위기의 본질은 한 번 조직 속에 들어오면 절대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나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 위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면 반드시 내게 다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위기가 감지되는 순간 리더는 ‘지금이 최악’이라는 생각으로 전략을 짜야 합니다.”

얼음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대원들에게 “곧 구조대가 갈 것이다”란 말로 희망을 심어주기보다는 “최악의 경우 3일간은 스스로 버텨야 한다. 하지만 넌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오너가의 잘못을 감추려다 오히려 일을 키운 한 기업의 사례도 곁들였다. 위기를 직시하지 못하고 가볍게 생각한 대가는 그만큼 혹독하다는 설명과 함께.

윤 부소장은 이렇게도 말했다. “위기에 필요한 리더십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원칙과 기본입니다. 남극에서 이를 버리면 대원들의 목숨이 위험하죠.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한국경제에 반갑지 않은 소식이 많이 들린다. 엔화 약세를 표방한 아베노믹스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렉시트(Grexit·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금융시장도 불안하다. 유가 폭락의 직격탄을 맞은 정유·화학업계에선 ‘곡소리’가 난다.

1월이 거의 다 지나갔는데도 올해 경영계획을 확정짓지 못한 곳이 많다. 경제 상황이 불확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 비록 경영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이 최악”이라는 윤 부소장의 ‘극한 리더십’을 한 번쯤 곱씹어 보면 어떨까.

김창덕 산업부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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