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52> 비키니 옷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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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니 옷장
―김윤한(1959∼)

지퍼를 열면
볼 시린 가족의 일상들이
차곡차곡 접혀 있었다
마당이 없었지만
대신 넓은 하늘이 있었고
바깥이 매섭도록 추웠으므로
연탄아궁이는 더 따뜻했다
단칸 셋방이었지만 언제나
방보다 수천 배 큰 꿈이 있었다
비록 좁은 방 한구석에서
맑은 가난을 지키고 서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시간에도
상징처럼 가족을 확인해 주는
온기 가득한 공간이었다
비록 눈 뜨면 가난했지만
지퍼를 닫으면
옷장에 그려진 꿈들이
수천 마리 나비가 되어 일제히
하늘 가득 날아오르곤 했다

이삼십 년 저편의 아득한 정경이다. 가느다란 알루미늄 파이프 뼈대에 비닐 커버를 씌워 지퍼로 여닫게 만든 비키니 옷장. 당시 유행했던, 몸의 위아래 주요 부분을 두 조각 천으로 가리는 여성용 수영복 비키니에서 따온 이름일 테다.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그 간이옷장은 운반도 설치도 쉽고 비교적 저렴해서, 자취방에서 객지 생활을 하는 학생이나 직장인이 많이들 장만하던 세간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서민들이 사는 옛날 동네인데도 멀쩡한 가구가 노란 딱지를 붙이고 수거되기를 기다리며 길바닥에 나앉은 모습을 흔히 본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내놓은 가구이리라. 이리 물자가 넘쳐나는 세태가 화자로 하여금 그 옛날의 비키니 옷장을 새삼 떠오르게 했을 테다. 마당도 없는 집의 단칸 셋방에서 연탄을 때며 살던 시절, ‘바깥이 매섭도록’ 추운 날이면 복닥거리는 식구들이 발을 모으고 누워 있는 구들장이 아무리 뜨거워도 방 공기는 볼이 시리도록 차가웠을 테다. 그랬었다. 방에서도 그릇에 담긴 물이 깡깡 얼곤 했었다. 그 춥고 좁은 방을 크게 차지하고 있던, 작은 비키니 옷장. 그것이 없었으면 방 안 여기저기 널려 있을 이부자리며 남루를 어찌 정리해서 가릴 수 있었으랴. 화자에게 비키니 옷장은 ‘맑은 가난을 지키고 서 있’던 상징물이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에는 가난도 맑았어라. 신혼이거나, 아이들이 아직 어린 젊은 주부가 제 취향대로 고른 은은하거나 화사한 문양의 비키니 옷장을 단칸 셋방에 들여놓고 느꼈을 소박한 기쁨이여.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내일의 꿈이 있던 따뜻한 시절이여.

황인숙 시인
#비키니 옷장#김윤한#가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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