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353>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
―정재학(1974∼)

항구의 여름, 반도네온이 파란 바람을 흘리고 있었다 홍수에 떠내려간 길을 찾는다 길이 있던 곳에는 버드나무 하나 푸른 선율에 흔들리며 서 있었다 버들을 안자 가늘고 어여쁜 가지들이 나를 감싼다 그녀의 이빨들이 출렁이다가 내 두 눈에 녹아 흐른다 내 몸에서 가장 하얗게 빛나는 그곳에 모음(母音)들이 쏟아진다 어린 버드나무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깊은 바다였다니… 나는 그녀의 어디쯤 잠기고 있는 것일까 깊이를 알 수 없이 짙은 코발트블루, 수많은 글자들이 가득한 바다, 나는 한 번에 모든 자음(子音)이 될 순 없었다 부끄러웠다 죽어서도 그녀의 밑바닥에 다다르지 못한 채 유랑할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반도네온의 풍성한 화음처럼 퍼지면서 겹쳐진다 파란 바람이 불었다 파란 냄새가 난다 버드나무 한그루 내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일 듯한 고장의 어느 항구, 화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때는 여름, 날씨는 쾌청. 남미의 화창한 햇빛 속에 ‘반도네온이 파란 바람을 흘리고 있었다’. 근처 카페에서 아마 피아졸라의 애수에 찬 탱고 곡을 틀어놨을 테다. 바다에서는 순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여행지에서의 정취 물씬한 이 순간, 달콤한 안식과 평화에 젖을 만도 한데 화자는 고양되고 격앙되고 고뇌한다. 반도네온 소리가 화자의 깊은 곳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화자는 ‘길’을 잃은, 그것도 ‘홍수에 떠내려간’ 듯 찾을 길 없이 잃어버린,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한 음악소리가 아슴푸레 그 길을 비춰주는 것이다. ‘버드나무 하나 푸른 선율에 흔들리며 서 있’는 모습으로.

화자는 안타까이 ‘버들을 안’는다. 그러자 ‘가늘고 어여쁜 가지들이’ 화자를 감싼다. 버들의 여린 잎들이 물결처럼 반짝이며 출렁출렁, 화자 ‘몸의 가장 하얗게 빛나는 그곳’, 아마 영혼에 ‘모음들을’ 쏟아낸단다. 그 희열! 그런데 자신은 그걸 감당해 받아내지 못하리란다. 그 안타까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끝내 ‘유랑할 것’이란다. 파르스름한 반도네온 소리가 퍼지고 겹쳐 코발트블루로 엉기는 화자의 가슴이다.

빛은 파동이며 입자라지. 음악은 빛과 같다. 반도네온 연주 소리가 바람과 버드나무와 ‘이빨들’을 가진 어린 처녀와 바다로 변신하며 시인에게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이 신화적으로 펼쳐진다. 프시케에 대한 에로스의 애타는 사랑을 보는 듯한,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뮤즈에 대한 시인의 애달픈 사랑.

황인숙 시인
#반도네온이 쏟아낸 블루#정재학#부에노스아이레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