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버리지 못하는 것도 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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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누그러들면서 가을빛이 완연하다. 가을 옷을 꺼내고 여름옷을 넣으려다 보니 긴 여름 내내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반 이상이다. 결코 옷이 많아서가 아니다. 10년이 더 지난 옷도 버리지 못하고 일 년에 한 번씩 연례행사처럼 꺼냈다 넣었다 반복하다 보니 그렇다. 결국은 대여섯 벌만 계속 갈아입었을 뿐, 나머지는 꺼낸 그대로 있다가 다시 박스로 들어간다.

지난 10년 동안 1년에 1kg 내외로 살금살금 체중이 늘어서 10년 전 옷은 입을 수 없는데도 “살 빼면 입어야지”라는 헛된 기대로, 디자인이 예쁘긴 하지만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 입지 못하면서도 “나중에 혹시 딸이 입으려나”라는 망상으로,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나중에 한가해지면 재봉을 배워서 옷을 고쳐 입어 볼까”라는 원대한 계획까지, 다양한 핑계로 옷 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산다.

그런데 지난주에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저장강박증이라는 병을 가진 사람의 집을 보여주는데, 완전 쓰레기더미였다. 방, 거실, 부엌, 화장실까지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이라곤 없었다. 저장강박은 절대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강박관념이라는데, 몇 년 동안 종이 한 장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지 못해서 집 안이 난장판이었다.

물론 병적이고 극단적인 사례지만 그 화면을 보면서 “아, 버리지 못하면 저렇게 되는구나!”, 한 방에 깨달았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면 난장판이 되듯이, 마음의 방 또한 적당하게 비우지 못하면 저렇게 너절하고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아무튼 이번 주말에 여름옷을 정리할 때는 헛된 기대를 접고 과감하게 버릴 결심을 하고 있다. 그나마 헌 옷은 분리수거하여 재활용을 하니까 나의 옷 박스 속에서 잠자는 것보다 훨씬 생산적인 일이라는 명분도 숙지해 두었다.

“어머니, 먹다 남은 반찬 지금 버릴까요, 냉장고에 넣었다가 일주일 후에 버릴까요?”

가까운 친척이 젊은 며느리의 당돌한 질문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며 웃었다. 먹고 남은 반찬이 아까워서 냉장고 구석에 밀어 넣었다가 결국은 먹지 못하고 버리는 시어머니의 습관을 꼬집는 말이다.

여름이 간다. 미련을 갖지 말고 버릴 것은 지금 버리자. 더불어 올여름의 우중충하고 눅눅한 잔재들도 이젠 다 털어버리고 햇과일처럼 싱싱하고 뽀송한 마음으로 경쾌하게 가을로 들어섰으면 좋겠다.

윤세영 수필가
#저장강박증#쓰레기#여름옷#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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