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81>연희―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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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하다
―안현미(1972∼ )

장원에는 고양이와 꿩이 살고
자정이오면스무개의창문은 목련처럼피어오른다

나는 장원의 심부름꾼
고양이, 꿩, 창문, 목련의 꿈을 작물처럼 가꾸는 자

손님들은 계절마다 얼굴을 바꾸고
나는 계절마다 버려진 얼굴을 뒤집어쓰고

나는 유희하는 자
나는 연희하는 자
나는 환희하는 자

생각해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바람은 불어오고
또다른 국면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다
고양이, 꿩, 창문, 목련, 물고기, 언어처럼

아아
꿈이 없다면
꿈이 없다면

나는 장원의 심부름꾼
우주로 쏘아올린 인공위성처럼
자정이 오면
09:00∼18:00까지의 나는 나를 작동하고

아아
꿈이 없다면
꿈이 없다면


‘연희문학창작촌’은 문인들이 편히 묵으면서 창작에 전념할 숙소가 있고, 일반인들에게는 알찬 문학행사로 개방된 공간이다. 시인 안현미는 거기 매니저다. 언제나 유쾌하게 웃는 얼굴로 시원시원 일을 해치우는 모습만 봤는데, 이런 애수를 품고 있었구나. 하긴 스무 개나 되는 방의 ‘계절마다 얼굴’이 바뀌는 손님들이며, 각종 행사며, 그 큰살림을 꾸려가기가 쉽지 않을 테다. 더욱이 이 시가 실린 시집 ‘사랑은 어느 날 수리된다’의 다른 시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로 미루어 화자는 ‘비정규직, 계약직, 시간제’이다. 10년 가까이 근무했을 텐데 지금은 정규직이 됐는지 궁금하다.

화자 자신 문인인데, 문인들을 위한 장원에서 심부름꾼으로 지내는 게 가끔은 쓸쓸했을 테다. 그러나 ‘나는 유희하는 자/나는 연희하는 자/나는 환희하는 자’! 화자는 자신의 본분을 생각하고 아이로니컬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다잡는다. 이용자들에게 유희와 연희와 환희를 제공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그에 보람을 느끼고 자기도 유희하고 연희하고 환희할 테지만, 자주 ‘버려진 얼굴을 뒤집어쓰고’, 때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태클이 걸려 괴로울 테다. 목련이 피는 봄밤, 화자는 탄식한다. ‘아아/꿈이 없다면/꿈이 없다면’!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도 꿈이고, 마음을 더 지치게 하는 것도 꿈일 테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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