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종수]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역사인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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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박정희-역사교과서… 첨예하게 대립한 보수와 진보
문창극 후보 인식의 한계 싸고 당파적 논리 앞세워 전선 확대
보수-진보의 역사전쟁 넘어 우리사회 역사성 회복 노력하라 내일의 건강한 정치 위해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오늘의 정치는 내일의 역사가 되고, 어제의 역사는 오늘의 정치를 지배한다. 요즘에는 이 말을 특히 실감한다. 내일의 역사를 자기편으로 서술하기 위한 정치싸움이 동북아 관계와 국내 정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창극 씨를 총리로 추천한 비서실장과 그를 낙점한 대통령의 심중은 무엇보다 그가 현 집권층의 역사인식을 충실하게 확산시킬 사람이라는 데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청문회를 앞두고 논란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강연 영상에 나타난 바로는 의도적 친일이나 기독교 근본주의자라고 그를 공격할 만한 내용이 분명하지는 않다. 그 세대의 한국인이 존재론적으로 지니게 되었을 한계들을 몇 가지 노출하고 있다. 여기에 보수와 진보 진영이 전선을 확대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영역까지 싸움이 확대되어 있는 분위기다.

보수와 진보는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4·19와 5·18을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역사교과서 검정에서도 갈등을 경험해 왔다. 그런데, 정작 문 후보자의 발언이 문제된 부분은 보수와 진보의 역사전쟁이 벌어지는 전선 이전의 지역이다.

‘이조’ ‘민비’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조선을 허송세월의 역사로 규정하고, 나라의 독립도 우리의 피땀과 상관없이 미국의 태평양전쟁 승리로 주어진 것이었고, 게으르고 불결한 백성이 선교사들 덕분에 개화되었다는 논리 부분이다. 이 논리는 일반 국민의 정서와 심각히 충돌하는 내용이고, 총리로서는 용인받기 어려운 자기부정의 역사인식인 셈이다.

보수와 진보 스스로도 종종 자기진영의 논리로 역사전쟁을 치르면서, 통시적 역사를 편의대로 부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일제강점기 이전의 역사에 대하여는 공통적으로 부정하여 자기 진영의 기여와 전망을 드라마틱하게 포장하려 한다. 그러면서 상대를 향하여는 역사를 부정하고 있다고 서로 비난한다. 보수는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진보는 박정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역사에 대한 자기부정과 자괴감의 뿌리는 분명 국권의 상실과 일제의 강점에서 발원하고 있다. 일제 35년을 너머 우리 역사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고, 치열하게 살아온 스스로의 자취를 부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 시각에 오염되면 519년 동안 통일국가를 이어온 조선의 슬기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천 년 이상 하나의 통일국가를 유지해 온 정신세계에 현재의 분열되고 분단된 자신을 비춰볼 겸양도 갖추기 어렵다.

그래도, 무서울 만큼 역사의 물줄기는 살아있다. 국민이 어떤 수준이건 그들을 ‘미개’하다고 하거나, 519년이 어떤 고난의 역사이건 그것을 허송세월이라고 하는 발언을 그 물줄기는 용납하지 않는다. 백성이 곧 하늘이라고 했으니, 하늘은 그 자체로 지엄한 것이기 때문이며, 역사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 자괴감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처방해줄 약(藥)이 있다. 주말에 시간을 내어 고려 불화(佛畵)의 아름다운 색감을 감상하거나, 인쇄술의 위대성을 추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조선시대 지어졌던 병산서원의 건축을 감상하거나 실록(實錄)에 기록된 임금과 신하의 논쟁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 그 색감과 아름다움, 그리고 지혜와 논리는 경탄할 만한 수준이다. 이 바탕 없이 우리가 선교사 때문에 개화되고 박정희 한 사람 때문에 근대화되었다고 설파하는 건 무리다.

역사가 이어진다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는 또 다른 약이 있다. 안동에 가서 우향계(友鄕契)를 이끄는 이석희 옹(89)을 만나보라. 우향계는 1478년 다섯 문중 13명의 선비가 향촌의 가치 수호와 친목을 위해 결성한 모임이다. 지금도 100명의 계원들이 계회를 갖고, 그 조직과 정신을 이어간다. 강릉에는 1466년 만들어진 금란계(金蘭契)가 있다. 매해 계원들은 네 차례 모임을 갖고, 예와 덕을 나눈다.

보수와 진보의 역사전쟁을 넘어 우리 사회의 역사성을 회복하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내일의 건강한 정치를 위해서 말이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문창극#역사교과서#보수#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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