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권순활]누가 기업과 일자리를 내쫓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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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활 논설위원
권순활 논설위원
“이런 기업 환경에서 한국에 공장을 짓는다면 미친 짓이죠.”

얼마 전 민간기업에서 일하는 지인이 대화 도중 불쑥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발언 수위가 워낙 높아 양해를 구한 뒤 수첩을 꺼내 메모했다.

그가 극언(極言)을 한 이유는 이렇다. 기업이 투자 결정에서 고려하는 핵심 변수는 땅값 인프라 인허가 같은 투자비와, 인건비 노조 정책협조 같은 생산비다. 한국은 각종 비용이 해외보다 더 먹힌다. 땅값 인건비는 그렇다 쳐도 인허가, 정책, 사회 분위기 같은 유·무형의 규제가 의욕을 더 떨어뜨린다.

지난해 기업의 해외 투자는 73.3% 급증한 반면 국내 설비투자는 1.5% 줄었다. 국내 투자 내용도 노후설비 교체나 효율성 제고를 위한 불가피한 투자가 신규 투자를 웃돈다. 왜 한국이 아닌 해외에 공장을 짓느냐고 국민정서법으로 따지기는 쉽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은 외면하고 윽박지르듯 투자를 강요할 수 있을까.

‘워크맨 신화’의 주역이었던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가 “미래의 기업은 조국의 열망에 따르기를 거부하고 이윤이 가장 크고 규제가 가장 작은 곳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말해 일본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이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 기업들이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 나라로 공장은 물론이고 본사까지 옮겨가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규제개혁 토론회에서 “규제개혁에 방점을 두는 것은 그것이 곧 일자리 창출이기 때문”이라며 “사람의 물건을 빼앗는 것만 도둑질이 아니고 일자리를 빼앗는 것도 큰 죄악”이라고 역설했다. 그날 관련 사설을 쓰기 위해 ‘7시간 끝장토론’을 지켜보면서 잘못된 규제, 불필요한 규제를 혁파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읽었다. 그러나 기업과 국민 생활을 옥죄는 뿌리 깊은 규제 사슬을 끊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음먹고 지방에 투자를 했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기업인이 많다. 이런저런 핑계로 일처리를 미루는 공무원은 한둘이 아니다. 기업을 ‘봉’으로 여기고 뜯어먹으려는 지방 관료와 의원, 사회단체는 또 어떤가. ‘헌법 위에 조례, 대통령 위에 시장-군수’라는 농담도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어느 경제학 교수는 저효율, 고비용 시스템의 근본 원인이 후진적 정치라고 단언했다. 대통령이나 정부가 아무리 규제개혁을 외쳐도 법률 개정이 필요한 내용이면 큰 기대를 않는 게 낫다. 이런 국회라면 한국 산업화의 빛나는 산물인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소양강 다목적댐 같은 미래를 위한 투자는 꿈도 꾸기 어렵다.

효율성을 다소 희생해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규제가 필요한 분야도 있다. 하지만 폐해가 훨씬 큰 ‘나쁜 규제’가 지천으로 널린 것은 더 명백하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회원국 중 4위의 규제 국가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갖고 있다.

김영삼 정부가 1993년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하자 그때까지 “실명제만이 살 길”이라고 아우성쳤던 일부 인사가 돌연 태도를 바꿔 부작용을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규제개혁을 둘러싸고도 그런 움직임이 감지된다. 좌파 정부 시절의 규제개혁에는 손뼉 쳤던 사람들이 우파 정부의 정책 어젠다라는 이유로 발목잡기에 급급한 듯한 모습은 씁쓸하다.

한국을 떠나는 기업이 늘어날수록 개인소득과 국부(國富), 일자리가 줄어든다. ‘규제 천국’에서는 기업들의 해외 탈출을 막지 못한다. 종합적 득실의 논란이 큰 몇몇 규제는 더 논의하더라도 기업과 일자리를 내쫓는 악성 규제와 관행은 반드시 혁파해야 한다. 규제개혁은 우리 국민과 자녀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앞날이 걸린, 더는 늦출 수 없는 국가 과제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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