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연수]공인인증서가 암 덩어리라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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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수 논설위원
신연수 논설위원
‘단군 이래 처음’이라는 대통령 주재 규제개혁회의가 7시간 동안 TV와 인터넷으로 생중계됐을 때 “속 시원하다”는 사람이 많았다. ‘뷔페식당 빵은 5km 이내 제과점에서 사야 한다’ 같은 희한한 규제에 놀랐고, 대통령이 기업인의 답답함을 대신해 장관들에게 따져 묻는 것도 통쾌했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재벌과 대기업 입장에서 거추장스러운 규제들이 싹 사라진다면 양들은 누가 지키나”라고 비판했지만 영세 자영업자들의 애로사항이 쏟아진 토론회의 실상을 외면한 말이다. 청와대에 160명이나 초청해 공개토론을 할 만큼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해 이번에는 규제개혁이 제대로 될 것이라는 기대도 높다.

그런데 정작 폐지하겠다는 규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이번 끝장토론에서 동네북이 된 공인인증서도 그중 하나다. 요즘 모바일뱅킹이나 인터넷쇼핑몰을 많이 사용하는데 회원 ID와 비밀번호 외에 공인인증서가 필요하다. 조금 번거롭지만 3개 카드사에서 1억400만 건, KT에서 12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마당에 공인인증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예 인터넷뱅킹을 못할 것이다. 공인인증서에 기술적 문제가 많아 더 발달된 기술로 대체한다면 환영이다. 그러나 정부가 새로운 인증 규정을 도입하면 그것도 규제다.

최근 개인정보가 대거 유출되자 금융당국은 10쪽이 넘는 재발방지 대책을 내놨다. 개인정보 제공 동의서 양식은 이렇게 해라, 주민번호 등 10개만 내게 해라, 5년만 보관해라…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규정했다. 경북 경주에서 체육관이 무너지는 참사가 발생하자 적설량 관련 건축 기준을 높이기로 했다. 갑상샘암 과잉진단이 문제가 되자 정부는 가이드라인을 만든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다 규제 아니면 뭔가. 사고가 나서 대책(규제) 만든다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며칠 후엔 규제를 없앤다고 호들갑이니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미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다. 미국처럼 세밀한 부분을 모두 기업 자율에 맡기면 규제가 확 줄어들 것이다. 다만 미국처럼 기업이 잘못하면 기업이 문 닫을 만큼 벌금을 매기고, 소비자에게 천 배 만 배 보상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서도 최근 ‘타깃’이라는 유통점에서 1억1000만 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타깃은 정부에 벌금 3조8000억 원을 내고, 앞으로 이어질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에서 훨씬 많은 금액을 배상해야 한다.

반면 더 많은 개인정보를 유출한 우리나라 금융회사들은 벌금이 고작 600만 원이고, 이번 대책에서 크게 올렸다는 게 최대 50억 원이다. 소비자 보호를 위해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거나 벌금을 높이려고 하면 “기업 다 망한다”고 반대하고, 벌금이 적은 대신 정부가 상세한 지침을 마련하면 “규제가 많다”고 우는소리 한다. 둘 다 싫으면 자유만 누리고 책임은 안 지겠다는 건가.

규제(regulation)는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룰(rule)이고 규범이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기업만 괴롭히는 규제는 당연히 없애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규제는 쳐부숴야 할 원수” “암 덩어리”라고 외치면 일선에서는 눈에 보이는 숫자 줄이기에 급급하게 된다. 마구잡이로 규제를 없애면 부작용이 커서 규제는 더 강하게 부활한다.

제도를 바꾸기 전에 공무원들이 민원인의 어려움을 원스톱으로 해결해주려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공무원의 눈높이를 현장에 맞춰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처럼 1381 전화가 개통됐는지 아닌지 실상도 모르고 대통령 보고에만 열중한다면? 장관들이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만 바라본다면 규제개혁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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