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하정민]크림반도와 한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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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 국제부 기자
하정민 국제부 기자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이기려면 소련이 필요해.”(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폴란드를 합병하고 싶은데….”(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서기장)

“동유럽을 소련에 넘겨줘선 안 돼.”(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2월 4일 크림반도 남부의 휴양지 얄타. 요즘 말로 ‘G3’ 수장인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이 만났다. 패전을 눈앞에 둔 독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셋의 속내는 제각각이었다.

가장 속이 탄 사람은 루스벨트.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20년 넘게 소아마비를 앓았고 심장병까지 겹친 중환자였다. 그 와중에 지구 반 바퀴를 날아 얄타에 온 터라 탈진 직전이었다. 그는 독일과 달리 일본 패망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오판했고 원자폭탄의 위력도 확신하지 못했다. 스탈린의 환심을 사 소련 참전을 유도하려 했던 루스벨트는 처칠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은 물론 사할린과 일본 북방영토(쿠릴열도)에서의 소련 우월권을 인정했다.

스탈린은 극동지역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루스벨트의 넘치는 양보에 흡족해했다. 그러면서도 참전을 질질 끌다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진 같은 해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눈 가리고 아웅’으로 참전한 소련은 6일 만에 승전국이 됐고 극동은 물론 동유럽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다.

한반도 분단과 냉전체제 출범의 도화선인 얄타회담은 이처럼 소련의 이득으로 끝났다. 루스벨트는 일본 패망도 못 본 채 얄타회담 두 달 뒤 숨졌고 회담 결과 또한 내내 미국 정부의 부담으로 남았다. 2005년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얄타회담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의 자유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희생시킨 부당한 전통을 따랐다”며 2차 대전 사후처리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인정했다.

지금은 크림반도가 미국 대통령의 골칫거리다. 이민법, 오바마케어 등으로 그렇지 않아도 낮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지지율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거치면서 취임 뒤 최저치인 38%까지 떨어졌다. 워싱턴포스트는 “19세기에나 가능할 일이 21세기에 일어났는데도 미국의 리더십 실종으로 전 세계가 위험에 빠졌다”라고 비판했다. 반면 시리아 화학무기 폐기안에 이어 또 러시아의 힘을 과시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지지율은 72%다. 데이나 로러배커 공화당 하원의원 등은 오바마 탄핵까지 거론하고 있다.

크림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은 남의 나라 불구경이 아니라 한국의 현안이기도 하다. 얄타회담의 세 참가자는 아무도 한반도에 관심이 없었지만 회담 결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강대국 간 이권 다툼에서 둘로 쪼개진 한국이었다. 60여 년이 흘렀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상태이며 강대국 간 나눠먹기가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강대국 사정에 따라 우크라이나 영토로 남을지, 러시아 영토로 넘어갈지 모르는 크림반도의 운명이 한반도와 유달리 비슷해 보인다면 과장일까.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크림반도#버락 오바마#지지율#블라디미르 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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