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지은]혼자 일하는 사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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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용역-하청-알바… 소속 없는, 위험하고 외로운 일자리만 늘어나는 우리 사회
온종일 대화-의지할 사람 없이 노동자들, 일회용품으로 전락
‘살아남으려면 위험해도 해라’ 청소년들마저 내모는 사회…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나

정지은 사회평론가
정지은 사회평론가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다.’ 카사노바의 연애 원칙이 아니다.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가 만든 ‘십대 밑바닥노동 실태조사’ 자료에 빈번히 등장하는 현실 상황이다.

알바를 시작했다가 너무 힘들어서 반나절 만에 그만두겠다고 찾아가면 “그래? 그냥 가”라는 답이 돌아온다. 얼굴 보고 그만두는 건 그나마 양반이다. 공단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는 20대들은 한곳에서 3개월만 일해도 길게 일한 축에 속하고, 일감이 없으면 문자로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기도 한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 회사와 ‘몇 푼이라도 더 주면 미련 없이 옮긴다’는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어차피 소속감은 없으니 일하는 사람도 회사도 서로에게 아무런 미련이 없다. 일하는 사람들끼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뀌다 보니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친해지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곧 그만둘 사람들끼리 관계가 형성될 리 만무하다. 매뉴얼로 전달되지 않는 현장에서의 노하우는 전승은커녕 쌓일 틈도 없다. 옆 사람 이름조차 알기 귀찮아하는 노동 환경에서 안전이나 작업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아니라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 같았다”는 10대 청소년의 토로는 아프지만 정확한 현실이다.

요즘은 치킨집이나 중국집도 배달원을 직접 고용하는 대신 배달 대행업체와 계약을 맺고 건당 수수료를 지급한다. ‘배달 대행’이라는 제도의 등장은 얼핏 보면 합리적으로 느껴진다. 음식점 입장에서는 배달이 몰리는 시간에만 사람을 쓸 수 있으니 한산한 시간에 지출되는 임금을 줄일 수 있고, 알바생은 건당 돈을 받으니 조금만 더 부지런하면 더 많이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배달이 늦어져 반품이라도 들어오면 그 손해를 고스란히 알바생이 감당해야 한다. 배달 알바생을 사망에 이르게 했던 유명 프랜차이즈 피자집의 ‘30분 배달 보증제’는 없어졌지만, 위험 부담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상 가장 약자인, 음식점과 배달 대행업체 사이에 낀 알바생이 중간에 생기는 리스크를 떠안는 방식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게다가 노동 조건은 훨씬 더 나빠졌다.

‘소속 없는 노동’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히 혼자’라는 점이다. 배달 대행 알바 청소년의 경우 하루 종일 위험 부담과 스트레스가 높은 일을 하면서도 대화를 나누거나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그 모든 시간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실태 조사 자료를 읽으면서 얼마 전에 본 단편영화가 떠올랐다. 이주 노동자가 만든 영화였다. 공장 옆에 딸린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며 홀로 일하는 분이었다.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자 사장이 아예 공장을 맡긴 것이다. 일과는 단순하다. 바로 옆에 있는 공장의 셔터를 올리고 출근해 일하다 문을 닫고 다시 퇴근한다. 밥도 직접 해 먹으니 혼자다. 점심을 먹으면서 남은 소주를 마셔도 말릴 사람은커녕 말할 사람도 없다. 한국에 10년 가까이 있었지만 이분의 한국어는 거의 늘지 않았다.

사회학자 엄기호는 최근 저작 ‘단속사회’에서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한 사람으로부터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회는 망한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파견, 하청, 용역 등 소속 없는 위험하고 외로운 일자리만 늘어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는 망한 사회나 다름없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환영합니다’를 반복하는 주차 도우미, 대리운전 기사, 콜센터 상담원 등… 끊임없이 말하고 있지만 대화라고 부르긴 힘든 언어들이고, 상황에 따라 해야 하는 말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유의미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정(情) 붙일 사람 없이’ 하루 종일 배달만 하는 대행 알바 청소년은 과연 하루에 “맛있게 드세요. ○○원입니다” 외에 몇 마디나 더 할 수 있을까? 이 아이들에게 살아가는(live) 법을 이야기해 주기는커녕 살아남으려면(survive) 위험한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내모는 사회를 과연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지금 대체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걸까.

정지은 사회평론가
#일자리#노동자#소속감#알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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