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이 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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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피천득(1910∼2007)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 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작가 이중근 씨의 ’카르페 디엠’
작가 이중근 씨의 ’카르페 디엠’
조선 땅에 떨어진 외계인 도민준이 400년 세월을 가로질러 대한민국 톱스타 천송이와 펼친 유쾌하고 달달한 로맨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가 요즘 거대한 중국 대륙을 사로잡고 있다. 이번 주 폐막된 중국의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에서 거론될 만큼 대단한 인기다. 극 중에서 자기 별로 돌아간 도민준은 웜홀을 통해 천송이 곁으로 돌아왔다 다시 작별하는 일을 반복한다. 문득 나타나 문득 떠나는 남자, 이런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여자. 그 결말이 해피 엔딩인지 새드 엔딩인지 사람마다 해석은 엇갈린다. 하지만 천송이의 마지막 대사는 함께 보내는 하루하루에 몰입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지는 게 아쉽지 않냐고요? 전혀요. 오히려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간절해지게 돼요.”

어찌 보면 애틋한 사랑이지만 길게 생각하면 두 사람은 결코 ‘권태기’가 있을 수 없는 행복한 커플이다. 서로에 대한 집중력에 있어서만큼 지구상 최강을 다툴 만한 연인들일 테니 말이다. 굳이 로맨스가 아니라도 수필가인 금아 피천득의 ‘이 순간’은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그 얼마나 찬란한 기적인지 들려준다. 미래의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별을 쳐다보고, 친구와 대화하는 현재 이 순간에서 영원을 발견하는 지혜를 담백하게 그린 작품이다.

사진작가 이중근 씨는 생활 속 다양한 이미지를 촬영해 이를 새로운 패턴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눈 코 귀 같은 몸의 일부를 화려한 꽃잎처럼 재배열한 사진은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 불화(佛畵)인 만다라의 문양을 생각나게 한다. 작품의 제목은 ‘카르페 디엠’, ‘오늘을 잡아라(현재를 즐겨라). 가급적 내일이란 말은 최소한만 믿으며’란 뜻의 라틴어다.

‘별그대’ 커플처럼 순간순간 몰입하고 만족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한 달을, 한 해를 저축해 한 생을 채우는 것은 소중한 인생 공부다. 따지고 보면 기별 없이 찾아왔다 예고 없이 사라지는 게 도민준만은 아니다.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고 해마다 우리 곁에 찾아드는 봄 향기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봄은 없었다. 2014년 봄도 우리 생애 오직 한 번뿐이다.

문득 왔다 문득 사라진다. 그게 봄이다. 삶도 그렇다.

봄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오늘 이 봄을 잡아야겠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이 순간#피천득#사랑#연인#이중근#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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