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30>옛집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옛집
―김길녀(1964∼ )

이제 옛집 빈터에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다
버즘처럼 썩어가는 모과와
꽃바람에도 꿈쩍 않는 늙은 감나무 옆
부르튼 살결의 산수유 가지 끝에
차마 떨구지 못했던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
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
서둘러 골짜기로 찾아드는
저녁 햇살 붉다
덩그마니 댓돌 위에 앉은
흰 고무신 바람그늘 속
그네 타는 노란 꽃귀신들
풍장으로 뼈만 남은 허물어진 담벼락
감싸 안은 초록 넝쿨은
금이 간 장독 안에서
새벽이슬을 낳는다

지붕이고 벽이고 기둥이고 삭아 허물어져 댓돌만 남은 ‘옛집 빈터’다. 거기 살던 사람들 간 곳 없는데 산수유나무, 모과나무, 감나무는 철따라 꽃 피고 열매 맺는다.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 없이 무르익은 모과며 감이며 산수유며 땅바닥에 떨어져 뒹굴다 썩어가고 가지 끝에서 말라가고. 사람의 냄새를 지운 자연의 체취가 자욱이 피어오른다. 저녁 햇살도 서둘러 찾아드는 산골짜기 옛집에서 화자를 맞는 ‘산수유꽃만 사태지고 있는’ 빈터, 인간사에 아랑곳없이 제 생명력을 한껏 뻗치며 ‘풍장으로 뼈만 남은 허물어진 담벼락/감싸 안은 초록 넝쿨은/금이 간 장독 안에서/새벽이슬을 낳는다’. 제 살던 옛집에 찾아갔을 때는 유년 시절의 추억이랄지 제 살던 자취를 바랐을 텐데, 화자는 어떤 애상도 풀어놓지 않고 절제된 언어로 외부의 풍경을 그린다. 하긴 풍경화에도 그리는 이의 내면이 담겨 있을 터, 이 시가 보여주는 풍경은 그 자체로 가슴을 아릿하게 건드리는 아름다움이 있다.

‘지난해 붉은 산수유 열매/할머니 쪼그라든 젖꼭지 같다’에서의 할머니는 이 시가 실린 시집 ‘푸른 징조’에서 몇 차례 다루어지는 ‘처녀할머니’일 테다. 자식을 낳은 적 없이 후살이를, 혹은 남의집살이를 하던 ‘처녀할머니’가 끝까지 옛집을 지키셨을 테다. 피 안 섞인 화자를 귀여워하던 할머니가 ‘그네 타는 노란 꽃귀신들’ 속에 계실 테니 화자는 저녁 햇살 붉은 시간 산골짜기 옛집 빈터에서도 무섭지 않을 테다. 이제는 초록 넝쿨로 ‘금이 간 장독 안에서 새벽이슬을 낳을’ 할머니…. 화자는 할머니를 찾아 옛집에 왔던가 보다.

황인숙 시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