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승호의 경제 프리즘]현오석 부총리, 사표 쓰고 출전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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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멋진 계획’ 아니라 개혁저항 세력 돌파할 힘
대통령의 고통분담 필요하지만 ‘낙하산 파티’ 하며 계속 딴전
경제팀엔 힘 안 실어주고 홀대
‘국민 위한 부총리’ 사명감으로 결사전의 뜻 천명하고 출전하라

허승호 논설위원
허승호 논설위원
“미련 없다. 죽을 때를 잘 만나는 것도 장수(將帥)의 복이다.” 김영삼 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였던 이경식 씨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을 꽤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지만 쌀 개방의 책임을 지고 1993년 말 물러났다. ‘직(職)을 걸고 쌀 시장을 지키겠다’던 대통령을 대신해…. 쌀 협상이 타결되자 해임을 예감하며 한 말이다.

기자는 이번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성공을 낙관하지 않는다. 3개년 계획엔 통화 또는 재정정책이 없다. 순전히 구조개혁 덩어리다. 한국 경제에 필요한 개혁 항목들이 아주 잘 정리돼 있다. 제대로 실천된다면 경제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가 거대한 도약을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오석 경제팀이 무슨 대단한 과제를 새로 발굴한 것이 아니다. 이전 경제팀도, 역대 정권도 다 알고 있던 것들이다.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한 것은 기존 질서, 기존 생태계의 비효율성이 제거될 경우 서식 공간이 좁아지는 기득권 집단 때문이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멋진 계획’이 아니라 ‘이들의 저항을 돌파할 힘’이다. 여론의 압도적 지지가 필요하지만 지금 충분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군살을 발라내려면 내 생살을 먼저 잘라야 한다.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없다. 계획 발표 당일에도 낙하산 인사가 우수수 내려앉았다. 코미디 아닌가. 독주와 다그침은 넘쳐나지만 고통분담과 설득은 안 보인다.

여기다 경제팀은 무력하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대통령의 시시콜콜 지시가 경제팀 무기력의 근본 원인”이라고 정확하게 진단했다. 국정의 철학과 방향은 대통령의 몫, 정책화는 전문 관료의 몫이다. 정책의 조합과 수순에 대해 대통령이 부총리보다 잘 알 수는 없다. 대통령 지시가 시시콜콜 할수록 실무자 창의성은 휘발하고 경제팀 팀플레이는 실종하며 내각은 경화된다. 대통령은 ‘진돗개 정신’을 주문했다. 모든 장관을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푸들로 만들어놓고 글쎄, 그런 게 가능할까.

정상국가라면 대통령과 내각이 분권, 분업해야 한다. 분권 개념 없이 최고권력자가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표본이 북한이다. 북한이 공개하는 ‘1호 사진’의 전형적인 구도는 김정은은 지도하고 현장 간부들은 고개 숙인 채 받아 적는 모습이다. 과연 누가 현장을 더 잘 알까. 그런 일이 수십 년 누적된 결과가 현재의 북한이다. 닮아 가면 큰일 난다.

게다가 이번 계획의 발표 과정에서 현 경제팀은 다리 훑은 산낙지처럼 사지에 힘이 빠졌다. 기획재정부가 언론에 배포한 계획안은 ‘3대 전략, 15대 핵심과제, 100대 실행과제’로 구성됐다. 그러나 엿새 후 공식 발표된 것은 ‘9대 핵심과제 및 통일시대 준비과제’였다. 100대 실행과제 중 44개는 사라졌다. 발표 형식도 그렇다. 기재부는 “대통령이 큰 줄기를 제시하면 부총리가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밝힐 것”이라 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담화에 41분을 써가며 숫자까지 세세히 설명했다. 부총리의 기자회견은 당일 아침 돌연 취소됐다.

대통령이 힘을 실어주기는커녕 내놓고 홀대하며, 핵심 문제에선 재까지 뿌리는 국면에서 현오석 경제팀은 개혁 저항 세력과 승산이 희박한 싸움을 해야 한다. 사면초가다. 그러다가 몇 달 후, 성과가 미진하다며 부총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경질이다. 작년 9월 세법 개정 때도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라는 실현 불가능한 공약에 집착해 부총리로 하여금 괴상한 법안과 법 논리를 짜내게 해놓고는 비판 여론이 일자 부총리만 호되게 꾸짖었다.

대통령 쪽 ‘비정상의 정상화’는 기대난망인 것 같다. 그러나 3개년 계획의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대통령의 신임이 부족하다 해서 최선의 노력을 아니 쏟을 수는 없다. 대통령의 각료이기도 하지만 국민을 위한 경제 지휘부라는 사명이 훨씬 무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복(公僕)’이다. 온 힘을 다해 진인사(盡人事)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것이 현 부총리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부총리에게 권한다. ‘반년쯤 후의 날짜가 적힌 사표’를 내놓고 출전하시라. 직에 연연하지 않고, 그만두는 그 시점까지 결사전 하겠다는 의지를 안팎에 분명히 천명하라는 거다. 개혁을 위한 최소한의 추동력이라도 챙길 배수진이다. 사표 낼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잘 죽는 것도 복이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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