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한기흥]일제는 왜 독립문을 허물지 않았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기흥 논설위원
한기흥 논설위원
독립문의 상단 중앙엔 ‘獨立門’(무악재 쪽)과 ‘독립문’(영천시장 쪽)이라는 글자가 각각 한자와 한글로 새겨져 있다. 나무 현판 대신 단단한 석재에 자주국가의 염원을 담은 건 오래도록 그 큰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누구의 필적인지에 대해선 이완용(1858∼1926)설과 김가진(1846∼1922) 설이 엇갈린다. 두 사람 모두 당대의 명필이었다.

이완용이 썼다는 유력한 근거는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내 동리 名物’이라는 기사다. 독립문과 독립관을 소개하는 글로 독립문에 관한 원문은 이렇다.

“◇교북동큰길가에 독립문이 잇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파리에 잇는 개선문(凱旋門)과 비슷합니다. 이문은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일어낫슬 때 서재필(徐載弼)이란 이가 주창하야 세우게된 것이랍니다. 그우에 색여잇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리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리완용이라는 달은 리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령수후작각하올시다.(후략)”

요즘 표기법과 다르지만 이완용이 썼다는 걸 읽기 어렵지 않다. 이는 독립문 글자의 주인공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김가진 설은 주로 후손들이 주장하나 관련 사료가 없다.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보다는 뒤늦게나마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김가진이 썼다면 그나마 나을 텐데 정황을 보면 그 반대일 개연성이 높다.

독립문은 1896년 결성된 독립협회가 과거 중국 사신을 맞던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1897년 11월 20일경 세웠다.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된 이완용은 협회에 100원을 내는 등 독립문 건립에 크게 기여했다. 쌀 한 가마에 5∼6원 하던 때다. 그는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주춧돌을 놓는 정초식에 모인 수천 명의 동포 앞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독립을 하면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해치려고 한다면 구라파에 있는 폴란드란 나라처럼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것이다….” 김가진도 협회 위원이었으나 위상은 이완용이 더 높았다.

당시 조선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중국과의 오랜 조공 관계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이홍장이 전쟁을 끝내며 1895년 4월 17일 체결한 시모노세키 조약 1조는 이렇다.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에 해가 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일본이 청나라에 그런 요구를 한 건 아무 간섭 없이 조선을 삼키려는 정지작업이었을 뿐이다.

되돌아보면 독립문 건립 때 우선 염두에 둔 나라는 중국이었지 일본이 아니었다. 이완용이 변절해 나라를 팔아먹은 건 나중 일이다. 일본이 항일 운동가들을 서대문 감옥에 가두고 탄압하면서도 바로 옆 독립문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고적 제58호로 지정해 보호했던 배경이다.

옥중에서도 독립을 부르짖었던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그런 아이러니를 알았을까. 중국 일본으로부터 스스로 독립하지 못했던 역사가 더욱 가슴 아픈 3·1절이다. 프랑스 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던 베트남 인도네시아가 달리 보인다. 대한민국의 국력이 100년 전과는 비할 바 아니지만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놓고 보면 여전히 5등이다. 우리끼리 싸우면 강국이 못 된다는 건 일찍이 이완용도 간파했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독립문#이완용#김가진#중국#일본#3·1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