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용관]걸리버의 대한민국 표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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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 차장
정용관 정치부 차장
“출판기념회를 열면 출마한다고 소문이 날 것 같아서….”

그제 언론계 몇몇 후배와 만난 고건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 경복궁 근처에 있는 단골 음식점에서 오찬을 겸해 가진 조촐한 출판보고회였다.

‘국정은 소통이더라’라는 제목으로 곧 출간될 이 회고록은 550여 쪽 분량으로 그의 ‘공인(公人) 50년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책 저변에 흐르는 화두는 ‘공인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나’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한다고 해서 획일적으로 집단의 의사를 강요하는 것은 집단주의, 파시즘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공인에겐 소통이야말로 주된 수단이자 목적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스스로를 놓는 역지사지(易地思之)야말로 필수 자세이자 방법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역지사지의 소통.’ 이젠 다시 공직을 맡을 일이 없어 보이는 그가 후배 공인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이 한마디에 농축돼 있다. 그는 평소에도 “소통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귀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해왔다.

그의 ‘공자님 말씀’이 던지는 울림이 유독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국 상황과 무관치 않다.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등을 둘러싼 정치권의 한 치 양보 없는 다툼 속에 어느덧 박근혜 정부 1년차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일각에선 대선 후 1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부정선거 타령이고, 어느 원로신부라는 이는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까지 열더니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은 당연하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에 대통령의 입에서 “용납하거나 묵과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는 게 요즘 현실이다.

여야는 적대적 공존을 넘어 ‘공멸의 길’로 접어들기로 작정한 듯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정기국회가 열린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여야가 뭘 합의해 처리했다는 기억이 없다. 오죽하면 김황식 전 총리가 국회의원들 앞에서 “헌법에 왜 국회해산제도가 없는지…”라며 “국회해산제도가 있었으면 국회를 해산시키고 다시 국민 심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일갈했을까.

문득 조너선 스위프트의 풍자소설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발상이 떠오른다. 각 정당에서 100명의 지도자를 뽑은 뒤 2명의 훌륭한 외과의사로 하여금 이들의 머리를 반으로 잘라 반대편 정당 지도자의 머리에 붙이자는 거다. 그렇게 하나의 두개골 속에서 논쟁을 하게 되면 서로를 잘 이해하고 조화와 중용을 찾게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이 책에는 좀 더 현실적인 방안도 나온다. 의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거나 변호한 뒤 정반대 방향으로 투표를 하도록 하면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의회가 움직일 거라는 주장이다. 걸리버가 신랄하게 비꼰 300년 전의 영국 의회나 요즘 한국 국회나 본질적으로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다.

누군가는 소통의 요체를 해통(解痛)으로 풀이했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얘기를 마음으로 듣고 체감한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설명이다. 그런 자세로 꽉 막힌 국정을 풀 방법은 정녕 없는가.

첨언 하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키가 15cm도 채 안 되는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선 ‘계란의 넓고 둥근 쪽의 끝부분을 깨어 먹는 파’와 ‘좁은 쪽의 끝부분을 깨어 먹는 파’가 36개월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인다. 그들보다 12배가 큰 걸리버가 보기에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걸리버가 환생해 표류하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 도착한다면 쓸거리가 참 많을 것 같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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