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태현]투키디데스의 망령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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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기원전 5세기 그리스, 그중에서도 아테네는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다. 헤로도토스의 사서(史書), 히포크라테스의 의서(醫書), 소포클레스의 희곡,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모두 당시의 작품이다. 그 세기 말엽 이 모든 것을 집대성한 저작이 나왔다. 극적인 구도,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 그리고 메스처럼 날카로운 분석을 겸비한 그것은 바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였다.

그 전쟁은 신흥 강대국 아테네와 전래의 패권국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지배권과 문명의 표준을 놓고 다툰 패권 전쟁이었다. 27년간 지속된 이 전쟁에서 결국 스파르타가 승리했다. 그러나 모두가 탈진한 나머지 새로이 부상하는 알렉산더 왕의 마케도니아에 지역의 지배권을 내주고, 종국에는 신흥 로마에 지중해의 패권을 내주어 찬란했던 고대 그리스시대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국가 사이의 전쟁과 평화를 연구하는 국제정치학자들에게 있어 이 책은 많은 영감을 주는 보고(寶庫)이자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권위로 인정돼 왔다. 그런 만큼 자주 인용되고, 자주 인용되는 만큼 오용되기도 한다. 그중 하나가 “강자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자는 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말이다. 위대한 국제정치학자가 주는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겨지는 이 말은 사실 권력과 승리에 취해 타락한 아테네인들이 한 말을 그가 비꼬듯이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유명한 말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아테네의 부상과 그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이었다.” 실제로 그 전쟁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침공하면서 시작됐기 때문에, 이 말은 기존의 패권국이 새로이 부상하는 신흥국을 상대로 예방 전쟁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강대국 사이에 세력 전이가 있으면 흔히 인용되는 말이 됐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은 중국의 부상과 그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이었다.”

중국이 급속히 부상하면서 그런 생각이 망령처럼 우리 사회를 떠돌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를 분열시켰던 외교안보 문제, 예컨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제주해군기지를 둘러싼 논란이 바로 그 망령의 영향이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 싸우면 그 사이에 낀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나 세상사는 그처럼 단순하지 않았고 전쟁의 원인도 복잡했다. 그 전쟁은 얌전히 있는 아테네를 스파르타가 침공한 것이 아니었다. 아테네가 먼저 도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능력만 따지자면 당시 아테네는 어쩌면 그리스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여전히 스파르타를 맹주로 인정하고 따랐다. 그래서 아테네는 가벼운 일전(一戰)을 통해 그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일단 벌어지면 가벼운 일전으로 끝나기 어려운 법이다. 가벼운 일전이란 정치지도자의 생각이었을 뿐, 전쟁의 혈기와 광기는 쉽게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 죽이고 파괴하면서 전쟁은 치열해지고, 결국 끝장을 보게 됐다. 게다가 주변의 많은 국가들이 때로는 내부의 권력투쟁 때문에, 때로는 이웃 나라와의 갈등 때문에 전쟁에 개입하고 전쟁을 이용하면서 급속히 확대됐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통해 투키디데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사실은 매우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역사의 전개에서 우연의 역할이었다. 인간은 때로 나약하고 때로 사악했다. 생각지도 않았던 돌림병으로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자 종교와 도덕이 무력해졌다. 권력투쟁의 광기에 빠지자 부모형제도 몰라봤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벌어지자, 그 찬란한 문명을 이뤄 냈던 인간은 야수보다 잔인해졌다.

그 역사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세력전이라는 구조적 변화가 아니다.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이 가지는 강점과 약점, 그것을 다스리는 정치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관리하는 정치지도자의 현명함이다.

지금, 2500년 전의 고전을 되새기는 것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명제 때문이 아니라, 인류가 오늘의 문명을 이룬 것은 역사를 보고 배우고 때로는 깨뜨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리스 문명을 집대성한 위대한 저작이 망령으로 떠돌아서는 안 될 일이다.

김태현 중앙대 교수 국가대전략연구소장
#아테네#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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