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천광암]빨간 재킷과 외바퀴자전거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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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경제부장
천광암 경제부장
1960, 70년대 수출입국(輸出立國)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수출진흥확대회의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애정은 각별했다고 한다. 1965년부터 1977년까지 162번의 회의가 열렸으며, 이 중 160번을 대통령이 직접 주재했다. 회의 초반에는 상공부와 외무부 차관이 230여 명의 참석자 앞에서 브리핑을 했는데,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박 대통령은 일절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대통령의 관심이 각별하다 보니, 모 차관은 브리핑을 잘하기 위해 아나운서학원에 다니기까지 했다.

박 대통령은 이 회의를 통해 수출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대외여건이 나빠서 수출목표 달성이 위태위태할 때는 “목표 달성을 못하면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각료들이 사표를 내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수출을 가로막는 ‘대못’과 ‘손톱 밑 가시’를 뽑아내는 자리이기도 했다. 1967년 3월 부산에서 회의가 열렸을 때는 중소기업은행 부산지점의 대출을 놓고 “왜 대출이 양조장에 편중됐느냐” “담보가 없다고 유망한 기업에 대출을 안 해줘서 되겠느냐”고 대통령이 조목조목 지적해 지점장은 실신지경이 되고, 은행장은 진땀을 흘렸다.

어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재한 2차 무역투자진흥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수출진흥확대회의의 골격을 그대로 답습한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한국경제 구조가 고도화함에 따라 회의의 주제가 ‘수출’에서 ‘무역(=수출+수입)+투자’로 확대됐지만 회의의 성격·시간·형식, 대통령의 회의 주재 스타일까지 판박이에 가깝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이 회의에 얼마나 힘이 실릴지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어제 회의는 박근혜노믹스의 향후 이정표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리였다. 지금까지 박근혜노믹스와 관련한 경제계의 불만은 컬러가 전혀 다른 ‘경제민주화’와 ‘투자활성화’를 동시에 강조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박 대통령은 그제 언론사 논설실장들과의 오찬에서 “(경제민주화) 중점 법안 7개 중 6개가 이번 국회에 통과가 돼 거의 끝에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교통정리’를 했다. 그 하루 뒤에 예정된 투자 관련 회의다 보니 경제계는 박 대통령의 전날 발언이 ‘일회성’인지, 지속적인 의지가 담긴 말인지 촉각을 곤두세운 터였다.

때로 경제계는 정부가 두툼한 보고서에 담아 내놓는 정책패키지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나 작은 몸짓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박 대통령은 이날 토론을 마무리하면서 “투자를 하는 분들은 업고 다녀야 한다. 이분들이 경제를 살리는 거고, 일자리를 만드는 거고, 소비도 활성화하는 거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들의 투자를 당부하기 위해 대통령이 ‘립서비스’를 한 적은 과거 정권에서도 많았지만 “업고 다니겠다”는 파격적인 수사를 한 대통령은 없었다.

박 대통령은 또 이날 회의에 빨간색 재킷을 입고 나왔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이 “우리 경제에 많은 열정을 불어넣어 경제를 활력 있게 살려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고 직접 설명하기까지 했다. 박 대통령은 대선 전날인 지난해 12월 18일 증권거래소를 방문했을 때도 빨간색 재킷을 입었고, 역시 비슷한 설명을 했다. 지난달 중국 방문 때도 빨간 재킷을 입은 적이 있다. 양국의 경제인들이 참여한 한중비즈니스포럼에서 연설을 할 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9년 2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앞두고 “한국경제는 외바퀴자전거다. 줄곧 달려야지 멈추면 넘어진다”며 ‘외바퀴자전거론’을 편 적이 있다.

경제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경제는 올해 2분기까지 9개 분기 연속 0%대 성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외바퀴자전거가 멈춰 넘어지지 않도록 박근혜 대통령이 빨간 재킷을 입는 날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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