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종수]악의 평범성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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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나치 독일 치하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패전 후 성형까지 하고 잠적했지만 15년이나 끈질기게 추적한 이스라엘 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1960년 5월 11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에서 체포됐다. 예루살렘으로 압송된 아이히만은 곧 재판에 회부됐다. 이 역사적인 재판을 정치철학자인 해나 아렌트는 빠짐없이 참관하고 이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썼다. 아렌트가 최종적으로 던진 결론은 ‘악의 평범성’이라는 단어였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조금 생각이 이상할 뿐, 그에게서 거악(巨惡)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아내를 사랑하며, 매우 긍정적인,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살인의 충동과는 거리가 멀었고, 유대인을 혐오하지도 않았다. 그 스스로도 자신은 안보경찰국 과장으로 조직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근본적으로 잘못된 오류의 희생자일 뿐이며, 직접적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살상 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이 크다”고 사형을 선고했다.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학살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저지른 모순 앞에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행위자의 작은 동기와 거대한 비극, 그리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반복되는 인간의 부조리를 생각하면서, 최근 반복되는 원전 비리가 떠올랐다. 벌써 몇 년 동안 비리가 터져 나왔는데도, 그게 바로잡아지기는커녕 동네 구멍가게 납품 비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연속되어 왔다. 원전의 비리 소식이 근래 처음 보도된 것이 2009년이었는데, 그 후 4년 동안 동아일보 뉴스면에 나타났던 원전 비리 소식만 해도 총 29회에 달한다.

이 29라는 숫자는 대단히 엄중한 숫자다. 하인리히 법칙에 따르면, 재앙에 대비할 수 있는 관용의 기간이 다 끝났다는 의미의 숫자다.

1920년대 중반 미국의 보험회사 손실통제국에 ‘H W 하인리히’라는 부장이 일하고 있었다. 그는 7만5000건의 사고통계를 분석한 후 흥미로운 결과를 얻었다. 하나의 거대한 재앙이 발생하기까지는, 그 전에 29회의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그 과정에 300회의 경미한 사고가 나타난다는 법칙을 발견했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재앙은 그렇게 오는 법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천둥이나 번개 같은 경고를 앞세우고 오는 법이다. 우리는 이제 원전사고와 관련된 경고성 유예기간을 거의 소진했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국무총리가 뒤늦게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이 거대한 재앙을 담보로 하는 비리가 4년이나 지속되도록 방치한 정부의 무책임과 비리에 연루된 사람들의 위험 불감증에 소름이 끼친다. 원자력발전이 바람직하냐, 혹은 바람직하지 않으냐 같은 한가한 논쟁 이전에, 이런 비리가 인간과 사회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행위로 인식되고 교정되지 않는 것이 의아스럽다. 부패의 발생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교정하는 사회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조직에는 부조리가 하나의 관성으로 자리 잡고, 정상적인 사유와 행동을 못 하도록 구속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일상화된 부조리에 가책을 느껴 공익 제보를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을 우리는 오히려 배신자로 낙인찍고, 쫓아내며, 파탄을 선사하기 일쑤다.

원전 비리로 구속된 한국수력원자력의 송모 부장과 황모 과장도 평범한 직장인이었을 것이다. 가정을 위하고, 자녀의 과외비 때문에 돈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각자는 1000만 원대의 돈을 받고 선후배의 편의를 봐주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다.

당장 원전의 가동을 중단하는 바람에 사회적으로는 2조4000억 원의 손실이 초래되고 있다. 이것은 그래도 약과다. 1986년 옛 소련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수천 명의 희생자를 발생시켰고, 반경 30km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도 여의도 면적의 11배에 달하는 땅을 버려진 땅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변에 누출된 플루토늄이 반감되기까지는 2만40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악은 괴물의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일상적 삶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평범한 일상의 디테일 속에 거대한 악도, 커다란 선도 숨어 있는 듯하다. 대통령도 민초도, 이 평범한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개인은 지금 자신이 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분별하는 사고를 하고,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공공성이 민감하게 논의되는 시스템을 가꾸는 일이 중요하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행정학
#나치#악#카를 아돌프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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