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푸틴과 메드베데프가 갑을(甲乙)?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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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커뮤니티 사이트 캡처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 캡처
최근 여야 의원들이 ‘갑을관계’ 폐해를 없애겠다면서 입법을 앞다투어 내고 있다. 스스로 그동안 ‘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앞다퉈 자신의 경험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기도 했다.

갑을관계가 입에 오르내리면서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한 누리꾼은 “한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러시아 친구가 ‘방송에서 갑을, 갑을 하는데 갑을이 뭐냐’고 하길래 한참 고민하다 ‘푸틴과 메드베데프 관계라고나 할까?’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아∼’ 하며 단번에 알아듣더라”라고 전했다. 강력한 권력을 가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앞에서 경질당할까 봐 눈치 보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를 빗댄 것이다.

이 와중에 어린 누리꾼들 중 일부는 “내가 아는 갑은 좋은 뜻인데 그렇게 나쁜 의미인 줄 몰랐다”며 원래 갑을관계의 뜻을 묻기도 했다. 이들이 알고 있는 갑의 내용은 이렇다. 몇 년 전, KIA의 이종범 선수는 야구를 워낙 잘해 팬들로부터 ‘야구신(神)’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다 한자를 잘 모르는 야구팬이 ‘이종범 야구神’을 그만 같은 발음의 ‘이종범 야구申’으로 써버린 것. 이 피켓을 흔드는 모습이 오랫동안 TV 화면에 잡혔다(2010년). 이를 보고,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에 (한자를 잘 읽지 못하는) 또 다른 팬이 ‘이종범 갑(甲)이래 낄낄’이라고 썼다. 한자가 헷갈려 신(申)을 갑(甲)으로 잘못 읽은 것.

이때부터 야구 커뮤니티 사이트를 주축으로 ‘이종범 갑’이라는 말이 우스개처럼 떠돌았다. 여기서 ‘갑’은 ‘한 분야에서 대단한 실력을 갖춰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변질됐다. 야구팬들이 워낙 많이 이용하는 사이트여서 번지는 속도가 빨랐다. 이 용어에 노출된 어린 학생들은 당연히 ‘갑’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인터넷 뉴스 기사에서도 ‘공항패션은 ○○○이 갑’ ‘지하철에서 민폐녀 갑은 바로 이것’ ‘네가 갑이다’ 식으로 일상용어 ‘최고’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이제 전 국민에게 ‘갑을’이란 말은 뇌리에 박혔다. 대부분의 사람은 ‘나는 을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을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갑일 때도 있다. 회사에서 고개를 숙이지만, 서비스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잔인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한 누리꾼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말을 올렸다. “내가 본 제일 무서운 갑은 을이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갑이 된 사람이었다. 을의 수모를 갑으로 몽땅 다 풀려고 하니까.”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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