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재명]박근혜 대통령의 100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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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치부 기자
이재명 정치부 기자
요즘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세 남자가 있다. ‘짝퉁’이 생겨날 정도로 글로벌 스타가 된 싸이가 첫 번째 주인공이다. 유사 이래 세계적으로 그보다 유명한 한국인은 없었다. 최근 국제적 인지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는 류현진이다. 29일 메이저리그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미국인들의 뇌리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새겼다. 한민족을 대표하는 마지막 한 남자는 김정은이다.

이 세 사람, 묘하게 닮았다. 넉넉한 풍채에 유난히 짧은 목. 누군가는 이들 세 사람의 외모가 한민족의 ‘표준 외모’로 잘못 알려질까 걱정된다며 농을 했다. 한 핏줄이 서로 닮는 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신문에 실린 김정은 사진에 시선이 확 꽂혔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나이 지긋한 최룡해 총정치국장과 김격식 총참모장 등 군 수뇌부가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받아 적고 있었다. 그 옆에서 우산을 받쳐 든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김정은은 아마도 “날래 하라우”를 연발하며 온갖 지시를 쏟아냈을 것이다.

‘어르신들의 받아쓰기’는 우리에게도 낯익은 풍경이다. 대통령이 말하면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받아 적고, 총리와 장관이 말하면 실국장들이 부리나케 메모한다. 지난달 민주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한 박근혜 대통령도 받아 적기만 했지 뚜렷하게 답을 한 것이 없다고 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전했다.

결국 정홍원 총리가 발끈했다. 며칠 전 간부회의를 주재하다 “정수리가 아닌 눈 좀 보고 회의를 하자. 받아쓰기 좀 그만하고 의견을 나누자”고 사정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측은함마저 든다.

박 대통령은 그제 국민경제자문회의를 주재하면서 “제2의 경제 부흥을 이루려면 기존 방식이나 관행을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고 했다. 관료사회의 첫 번째 관행을 꼽으라면 윗사람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꿈쩍하지 않는 것이다. 받아쓰기란 그런 경직성의 산물이다.

4일이면 박 대통령 취임 100일이다. 청와대 출입기자인 필자도 그 사이 무수히 많은 박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썼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한결같아서 이제는 어디서 무슨 얘기를 할지 대강 알아맞힐 수준이 됐다. 그러면서 의문도 커졌다. 왜 같은 얘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반복할까.

여러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박 대통령은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그러니 같은 주문을 지겹도록 반복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다. 과연 수첩에 ‘협업하라’ ‘현장을 챙겨라’ ‘성과를 내라’고 받아쓰면 현장과 성과 중심의 협업 시스템이 만들어질까. 100일 동안 지겹게 받아 적고도 바뀌지 않았다면 ‘받아쓰기 시스템’부터 점검해야 한다.

이재명 정치부 기자 egija@donga.com
#박근혜 대통령#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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