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비서실장의 17초 代讀 사과, 안 한 것만 못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1일 03시 00분


김용준 총리 후보자부터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까지 장차관급 6명이 각종 의혹으로 낙마했다. 부동산 투기, 무기중개상 로비스트, 성접대 의혹, 해외 비자금 계좌 논란 등 공직자 윤리 측면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와 인사검증 책임자인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문책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결국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달 30일 사과했다.

그런데 내용과 형식이 묘하다. 내용은 “새 정부 인사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인사위원장으로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두 문장짜리 17초 분량이었고, 그것조차 본인이 아닌 김행 대변인이 대독(代讀)했다.

사과를 할 바엔 인사 실패의 최종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대통령이 사과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다면 비서실장이 대통령 의중을 담아 사과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비서실장이 얼마나 바쁘기에 두 문장짜리 사과문을 대변인에게 읽도록 한단 말인가.

동아일보 창간 93주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인사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59.8%로 긍정적 평가(28.3%)보다 배 이상 많았다. 물론 박 대통령 지지자들 중에는 기대를 접지 않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진심어린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을 했더라면 국민의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무성의한 사과로 ‘불통(不通)리더십’의 진수를 보여줬다.

사과는 타이밍과 진정성이 생명이다. 이번 사과는 사전 예고 없이 주말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고위 당정청 워크숍을 앞두고 면피용으로 했다는 의심이 든다. 대변인 대독으로 진정성을 보여주는 데도 실패했다. 사과할 때도 예의가 있고 기술이 필요하다.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분명히 밝히고 책임소재를 가려야 하며 재발 방지 또는 잘못에 대한 개선 의지를 담아야 효과가 있다. 이번 사과는 내용과 형식에서 전혀 성의를 느낄 수 없었다. 무례한 사과는 안하느니만 못하다.

청와대는 신임 4강 대사(大使) 중 일부를 보도한 언론에 대해 국제관례를 깬 것이라며 유감을 표시한 뒤 명단 전체를 발표하면서 언론사에 일정 시점까지 보도 자제(엠바고)를 요청했다. 그러고선 명단 전체를 청와대 블로그에 올려 누구나 볼 수 있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하는 게 비서실인가. 비서실이 박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임기 초의 아마추어리즘에도 한계가 있다.
#비서실장#대리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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