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태효]급한 쪽은 북한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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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효 객원논설위원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태효 객원논설위원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연일 이어지는 북한 지도부의 도발적인 언사(言辭) 이면에는 고뇌가 담겨 있다. 서울이든 워싱턴이든 핵무기로 정밀 타격하여 불바다를 만들어버리겠다고 하는데도 한국의 코스피 지수는 오히려 상승세다. 한미 연례군사연습과 추가적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발하면서 정전협정의 파기를 운운하고 제2, 제3의 대응이 따를 것이라고 하는데도 우리 국민은 이른 봄 햇살 아래에서 평온한 모습이다. 시민이 불안해하며 우왕좌왕하고 정부는 갈팡질팡 혼선을 빚어야 할 텐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 북한 지도부로선 답답할 것이다.

북한이 지금 원하는 것은 대화다. 그것도 미국이 제의해서 북한이 마지못한 척 응하면 한국도 이에 뒤질세라 부랴부랴 나서는 그러한 대화다. 북한이 기대하는 대화의 의제는 한반도 정세 안정을 위한 대북 경제지원일 것이다.

비핵화 문제는 서로 신뢰를 좀더 쌓고 논의하자고 하면 되고, 나중에 가서는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완전히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며 추가적인 조건을 달면 그만이다. 과거 20년간 익히 보아 왔던 시나리오다. 남북 간 긴장국면이 최고조에 이르러 극적으로 대화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 국민은 내심 안도하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북한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횟수와 규모를 대북정책 성패의 잣대로 믿는 사람도 꽤 많았다.

북한의 도발을 막는 길은 확실한 대응 태세와 이의 이행에 대한 확고한 의지일 뿐이다. 대화와 지원으로 도발을 예방할 수 있다는 기대는 오래전에 깨졌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지원이 한창이던 1999년 북한의 북방한계선(NLL) 도발이 시작됐고, 작년 2월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큰마음 먹고 ‘영양지원(nutritional assistance)’을 약속하기가 무섭게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이후 이제껏 대남도발이 없는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달라진 한국 정부와 군의 태도 때문이라는 분석이 박근혜 정부 기간에도 유효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곧 춘궁기(春窮期)가 오면 인도적인 지원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의 분위기를 마련해보려고 한다는 고위당국자의 언급이 있었다. 혹시라도 이것이 적지 않은 양의 쌀 지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면 지금이라도 거두었으면 한다.

쌀은 북한에 전략물자이지 인도적인 품목이 아니다. 북한 당국은 모자란 쌀을 확보하게 되면 군대를 먼저 먹이고 나머지로 배급제를 강화해 지난 몇 년 사이에 크게 확대된 장마당 시장경제를 위축시키려 할 것이다. 2010년 10월 수해를 입은 북한 신의주 일대의 주민을 위해 쌀 5000t을 주었더니 나중에 주민에게서 도로 빼앗아 모두 군 부대로 옮겨놓은 것이 확인됐다. 이후부터 한미 당국은 장기간 보관이 어렵고 북한의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옥수수, 콩, 영양식품 등을 인도적인 ‘영양지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 인도적 지원에 인색했던 것도 아니다. 북한 당국이 지배계층에는 도움이 안 되고 주민은 남한에 고마워할 인도적 지원품목을 꺼려했을 뿐이다. 이제 북한 주민은 시장을 통해 스스로의 생활을 챙기는 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목적도 전략도 없이 북한과의 대화에 섣불리 뛰어드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 급한 쪽은 북한이지 우리가 아니다. 작금의 북한의 행보는 민심이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미국이나 한국이 빨리 나서서 대화를 제의해 달라는 메시지다. 대화와 협상은 반드시 필요한 외교 수단이다. 하지만 이를 철저히 악용하려는 북한을 상대로는 우리의 목표에 부합하는 대화가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우선 매진해야 한다.

먼저 북한의 어떠한 핵과 미사일 능력이라도 이를 사전에 무력화시키는 식별, 감시, 타격 능력을 구비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 작년 10월 타결된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안은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환경을 구비해 줬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북한 정권이 핵 보유 의지를 굽히지 않는 한, 정치적 수사(修辭)에 그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북한 지도부에 역발상을 통한 새로운 윈윈(win-win)의 길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일을 단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의 진전을 더디고 어렵게 만드는 다각도의 처방을 강구하고 관련국들과의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중국에 한층 책임 있는 태도를 주문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과연 한국은 그동안 얼마나 일관된 정책을 폈는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혹시라도 미국이 현재의 북한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안주하려 한다면, 우리가 나서서 북한에 변화의 기운을 불어넣는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2009년 한미 정상이 천명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평화통일을 어떻게 준비하고 앞당길 것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자면 100일 관리계획이 아니라 북한 마스터플랜이 나와야 한다. 북한과 대화에 나서기 전에 할 일이 많다.

김태효 객원논설위원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thkim01@skku.edu
#북한#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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