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삼성 없는 ‘시민의 정부’로 갈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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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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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매사에 경쟁적인 한국인들은 삼성에서 자신들이 갖고 싶어 하는 속성을 본다. 야망, 속도, 환경에 융통성 있게 적응해 최고를 유지하는 능력을.”

이번 대선의 주요 이슈가 경제민주화이고 그 중심에 삼성이 있다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지 최근 기사의 한 토막이다. “나는 재벌이 싫지만 내 자식은 재벌기업에 취직했으면 좋겠다”는 우리의 이중성을 지적한 대목은 마치 보기 싫은 거울을 들이대는 것 같다.

진보의 진화에 어두운 민주당

그제 서울 광화문 유세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는 “이번 대선은 우리 국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 결정하는 것”이라며 “재벌 대기업 자본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부인가, 중산층 서민을 먼저 생각하는 정부인가”를 물었다.

시장에선 지금 ‘모모 그룹은 손볼 대상 1호’라는 설이 분분하다. 새누리당이 총수 일가의 불법행위를 막되 기존 순환출자 규제 등은 반대하는 것과 달리 민주당은 재벌개혁 없이 경제민주화 없다는 입장이다. 문재인은 10일 TV토론에서 “재벌의 순기능도 있다”고 했지만 어제 정권교체를 강조하며 후보에서 사퇴한 이정희는 “(순환출자로 불린) 부의 집중구조를 없애는 게 재벌해체다. 문 후보는 재벌개혁이라고 하고 저는 재벌해체라고 한다”고 똑떨어지게 말해줬다.

삼성 개혁이든 해체든, 그래서 일자리가 늘고 서민이 잘살게 된다면 국리민복(國利民福)에 이로울 터다. 그러나 삼성이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에 기여하는 비중이 20%다. 위법 행위는 당연히 법대로 처리해야 마땅하되, 단지 잘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응징법까지 만들어 삼성의 목을 조른다면 양극화보다 먼저 국부(國富)가 확실하게 줄어들 공산이 크다.

워싱턴포스트 지적대로 삼성의 야망, 속도, 적응력과 그래서 톱에 오르고 지키는 능력은 때론 우리를 질리게 하는 한국의 속성이기도 하다. 한번 가면 ‘갈 데까지 가보자’며 유라시아 대륙에서 한반도 끝자락까지 달려온 조상들의 DNA가 우리 안에 있다. 덕분에 한국은 좁은 땅에서 미친 듯 경쟁하며 세계 10위권 경제가 가능한 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른바 진보가 싫어하는 정신은 이런 삼성의 속성과 정확히 일치한다. 정치학자 손호철에 따르면 ‘진보’는 시장경제에 비판적인 사회민주주의 이상의 좌파를 말한다. 그들은 재벌을 양극화의 주범으로 보듯 일등을 평등의 적으로 본다. 급변하는 환경에 재빨리 적응해 수출과 성장으로 선진국에 이른다는 국가적 비전은 그들 눈에 사악한 신자유주의적 음모일 뿐이다.

자본주의 전복까지 꿈꾸는가

문재인의 민주당은 새누리당과의 1 대 1 구도를 만들기 위해 좌클릭을 거듭해 진보정의당과 ‘희망 2013 승리 2012 원탁회의’까지 껴안는 대신, 시장경제를 인정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던 ‘노무현 정신’을 버렸다.

무덤에서 버림받은 노무현보다 슬픈 건 친노 민주당이 추구하는 정책 수단이 노무현 시대보다 뒤로 갔다는 사실이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대선공약이 비슷해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새누리당은 정부의 인위적 개입을 지양하는 시장경제적 기조이고, 민주당은 적극적 정부 개입으로 문제해결을 추구한다.

낡은 진보(old progressive)는 양극화 해소 자체를 목적으로 정부 역할을 확대하는 반면, 새로운 진보(new progressive)는 계층이동이 활발해져 양극화가 줄도록 시민의 힘을 키운다는 2010년 영국 BBC방송 보도에 견주면 민주당은 영락없는 낡은 진보다.

지금 우리에게 양극화 해소가 절실한 건 틀림없다. 그러나 세계가 한 무대에서 뛰는 세계화 시대에 우리끼리 경쟁을 없앤다고 해결될 건 없다. 유로 위기에서도 생산시장의 진입장벽,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풀어 더 경쟁하게 만들고 그래서 경쟁력을 키우는 구조조정이 해법으로 제시된다. 이 과정에서 처지는 사람들과 빈곤층, 젊은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과 교육 훈련은 필수다. 선진국 후진국 할 것 없이 정부와 기업이 결탁한 부정부패야말로 국민을 돌아서게 하는 최악의 공적(公敵)이다. 무능하면서 권력만 키운 정부는 더 위험하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가 내다본 ‘2013년 세계경제 대전망’은 “복합기업이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라며 삼성을 예로 들었다. 그런 기업을 손보기에 앞서 대통령부터 말단 공복(公僕)까지 최소한 세금 받는 만큼은 제 할 일을 제대로 해내는 새 정부여야 국리민복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

문재인이 이해찬과 함께 창립멤버로 참여했던 ‘원탁회의’는 남북분단과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체제를 지향한다. 재벌개혁으로도 모자라 시장경제마저 문제 삼는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이 ‘시민의 정부’를 구성하고 일일이 개입한다면, 삼성 같은 기업뿐 아니라 대한민국 체제, 한국 정치의 근본, 그리고 국민의 삶까지 다른 모습을 띨 것이다. 물론 유권자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위해 투표할 권리가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삼성#시민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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