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주성하]“다시 봤소!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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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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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국제부 기자
주성하 국제부 기자
평양에서 김일성대를 다닐 때 쿠바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친구가 있었다. 외국에 호기심이 많았던 나에게 그가 전해준 쿠바의 현실은 당시 북한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북한 유학생들이 배가 고파 인근 밭에 몰래 들어가 사탕수수를 빨아 먹었다는 이야기는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런 한심한 나라가 있나….”

당시 대학에는 외국인 유학생 100여 명이 있었다. 대다수가 중국에서 왔지만 간혹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유학생 기숙사에서 따로 살았다. 잘못하다 보위부에 불려갈 것을 우려한 북한 학생들은 유학생들에게 말을 건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북한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유학생 기숙사에서 풍기는 고소한 기름 냄새는 늘 허기진 북한 기숙사생들의 코를 자극했다.

북한은 외국인 유학생에게 ‘동숙생’이라는 이름으로 북한 기숙사생을 한 명씩 붙여주어 함께 자게 했다. 유학생들이 ‘조선말’을 빨리 배우게 하려는 배려의 명목이었지만 동숙생들은 매주 보위부에 유학생 감시보고서도 내야 했다. 식사시간에 유학생들이 “밥을 같이 먹자”고 하면 동숙생들은 “우리도 맛있는 밥을 배불리 먹는다”고 둘러댄 뒤 헐레벌떡 뛰어와 우리와 함께 한 줌도 못되는 잡곡밥을 먹었다. 일반 기숙사 식당에 올 수 없는 유학생들은 동숙생들이 어디선가 잘 먹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은 이렇게 유학생들에게 잘해 주는데 명색이 형제의 나라인 쿠바는 유학생들이 몰래 사탕수수를 빨아 먹게 했다니…. 얼마나 가난하면 그럴까 나름 동정도 했다. 실제로 소련 붕괴로 연간 60억 달러의 보조금이 끊긴 1990년대 초반 쿠바에도 북한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경제위기가 왔다. 모두가 굶주렸던 그 시기를 북한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렀지만 쿠바인들은 ‘특별한 시기’라고 불렀다.

피델 카스트로는 1994년 8월 국민의 해외 이주를 막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4만 명 이상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카스트로는 1980년에도 5개월 동안 항구를 개방해 13만 명의 미국행을 허용했다. 1960, 70년대 카스트로의 승인 아래 쿠바를 떠난 사람을 포함하면 쿠바 인구의 10% 이상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고도 쿠바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은 한 해 수십억 달러를 본국의 가족에게 송금해 쿠바를 먹여 살린다. 카스트로는 미국 이민자의 본국 송금을 합법화하고 가족이 합법적으로 이 돈을 사용할 수 있도록 외화상점을 마련해줬다.

며칠 전 라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 정부는 주민에 대한 여행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이번 조치를 기사로 쓰며 자료를 찾는 과정에 그냥 독재자라고 각인됐던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그가 ‘특별한 시기’ 초기인 1993년 개인자영업을 허가하고 1994년에는 제한적이나마 시장을 허용하는 경제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주민과의 긴밀한 소통을 무기로 하는 특유의 리더십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의 개혁은 가다 서다 하면서도 현재 해외여행 자유를 허용할 수 있는 단계로 전진했다.

3대 세습 후계자 김정은이 등장한 북한에도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올해부턴 8000위안(약 140만 원)을 내면 중국에 연고가 없어도 3개월짜리 중국 여행비자를 내주고 있다. 돈이 궁해 내놓은 조치겠지만 이렇게 계속 변해서 20년 뒤 북한 주민들도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날이 왔으면 정말 좋겠다.

김정은에게 쿠바처럼 문을 열어 남쪽으로 갈 사람은 다 가라고 선포할 용기는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20년 전 쿠바와 유사하게 이제 막 시작하려는 경제개혁을 다시 뒤로 돌리지 않는 용기 정도는 기대해도 될지 모르겠다.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카스트로#쿠바#김정은#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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