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乙로 사는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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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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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야권연대는 올해 총선과 대선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정치용어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 생선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다. 마치 사어(死語)가 된 듯하다. 언제 그런 말을 쓴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민주통합당으로 대표되는 민주세력과 통합진보당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진보세력 간의 야권연대는 의회권력의 장악과 보수세력의 집권 저지가 공동 목표였다. 그러나 각자의 노림수는 달랐다. 민주세력은 당장 자신들의 정권 창출을 원했다. 반면 진보세력은 의회권력의 지분을 늘리고 행정권력에 진출해 언젠가 자신들만의 집권이 가능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진보지수’를 끌어올리는 것이 노림수였다.

통진당과의 야권연대에 목매더니

민주당은 단기, 통진당은 장기 목표에 치중했으니 야권연대가 더 절실한 쪽은 당연히 민주당이었다. 그래서 민주당은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듯 통진당에 끌려갔다. 통진당과의 연대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당의 정강정책을 심하게 좌클릭 수정했다. 중도개혁을 지향하던 ‘민주당 뉴플랜’은 휴지조각처럼 버렸다. 통진당이 원하는 대로 ‘범야권 공동정책 합의문’을 만들고 ‘대한민국을 변화시킬 20개 약속’도 했다. 19대 총선의 공천 심사기준으로 정체성을 1순위에 올려 온건 중도 인사들을 솎아냈다. 지도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에 앞장서고,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세상사는 민주당이 의도하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민주당은 야권연대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패배했고, 통진당은 예기치 못한 당내 부정선거에다 종북(從北)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와해돼 버렸다. 그 바람에 대선 승리의 문을 여는 마스터키로 여겨졌던 야권연대도 덩달아 무너졌다. 상황이 이렇게 달라질지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민주당은 이제 통진당 대신 무소속 안철수 후보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다. 문재인 후보는 “안 후보를 믿는다”고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진다. 야권연대의 통진당처럼 후보 단일화에서는 안 후보가 선생님 격이자 갑(甲)이다. 안 후보는 민주당과 문 후보에게 후보 단일화의 조건으로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치권의 변화와 혁신을 이루라’는 숙제를 냈다. 정치권의 변화와 혁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민의 동의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문제를 출제한 안 후보도 해답을 갖고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문 후보는 요즘 안 후보를 따라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안 후보는 ‘국민통합’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정치개혁의 1순위로 꼽은 것도 통합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까지 참배했고, 자신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멘토로 선보였다. 그러자 문 후보는 과거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책사(策士)를 지냈던 보수 성향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을 캠프의 국민통합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윤 전 장관은 한때 안 후보의 멘토였다.

지금 文은 安에 매달리며 닮아가니

안 후보는 지금까지 알려진 이념 지향과는 달리 복지와 성장을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강조한다. 그러자 문 후보도 “보수는 성장에 역점을 두고, 진보는 분배에 역점을 두는 패러다임은 이미 낡았다고 본다”고 선언했다. 야권연대 시절에 통진당을 닮아갔듯이 후보 단일화의 숙제를 풀려면 안 후보를 닮아가는 게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사는 또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다.

두 번의 집권 경험이 있고 128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린 제1 야당이 필마단기(匹馬單騎) 안 후보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딱하다. 민주당은 언제쯤이면 만년 학생, 만년 을(乙)의 신세를 면하고 홀로 당당히 설 수 있을까.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민주당#대선#안철수#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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