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전승훈]커피전문점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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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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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 문화부 차장
전승훈 문화부 차장
최근 발간된 은희경의 소설 ‘태연한 인생’(창비)에는 주인공인 소설가 요셉이 동네 커피전문점을 훤히 꿰뚫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작업도 해야 하고 커피도 마셔야 하니까. 버스 정류장 앞 카페는 자리가 넓고 콘센트도 많아 일하기는 괜찮은 편이야. (…)주차장 뒤에 있는 카페는 오백 원만 더 주면 커피도 에스프레소로 리필해줘.”

영화 번역가 이미도 씨도 서울 역삼동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를 자신의 사무실처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오전 7시면 신문 3개를 들고 커피전문점을 찾는다. 신문을 꼼꼼히 다 읽은 뒤 번역이나 집필활동을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일한다. 퀵서비스도 커피전문점에서 받는다.

1999년 이화여대 앞 스타벅스 1호점이 개점하면서 불어 닥친 국내 커피전문점 열풍은 ‘된장녀’ 논란 속에서 시작됐다. 도대체 밥값보다 비싼 브랜드 커피를 즐기는 젊은 여성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커피전문점은 한 집 건너 하나씩, 동네 구석구석까지 번졌다.

불황 속에서도 커피전문점 시장이 연간 1조 원대로 급성장하게 된 원인은 무얼까? 단순히 커피맛 때문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 교수는 집이나 직장 이외의 부담없이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제3의 장소’라 불렀다. 한국사회에서 제3의 장소는 사랑방에서 시작해 다방, 카페, 노래방, PC방 등 시대에 따라 유행이 변해왔다.

커피전문점이 예전의 ‘제3의 장소’와 다른 점은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철저히 ‘개인적인 공간’이란 점이다. 대화를 나누러 온 사람도 있지만 리포트를 쓰고, 게임을 하고, 과외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데이트를 즐긴다. 취업난을 겪는 청년 백수들이 노트북을 꺼내놓고 일자리를 찾는 곳도 커피숍이다. 그런데 5000원짜리 아이스커피의 얼음이 다 녹도록 몇 시간씩 앉아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도심의 거대한 모바일 오피스가 된 커피숍은 각종 신조어도 만들어낸다. 커피숍에서 일하는 직장인 ‘코피스족’(커피+오피스)과 도서관처럼 활용하는 대학생 ‘카페브러리족’(카페+라이브러리)이 그들이다. 카페베네에 따르면 이처럼 일과 공부를 위해 커피숍을 찾는 고객이 전체 고객 중 40%를 차지한다고 한다. 휴식과 노동이 어우러지는 커피숍이 적막한 도서관이나 사무실보다 훨씬 생산성 높은 창작 공간으로 선호되는 것이다.

소설가 주원규 씨는 최근 200자 원고지 840장 분량의 장편소설 ‘반인간선언’(자음과모음)을 24시간 운영하는 홍대앞 커피전문점에서 나흘 만에 썼다. 커피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잠은 아예 자지 않은 상태에서 월요일 아침부터 목요일 오전 3시까지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이 되니 카타르시스가 몰려오고,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고 말했다.

스위스 출신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우리들의 창의성은 ‘샤이 애니멀(Shy animal)’, 즉 부끄러운 동물과 같아서 평소엔 잘 나오지 않지만 낯선 곳에 있으면 호기심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했다.(‘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요즘 나도 주말 저녁에는 지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책 한 권을 들고 커피전문점으로 향한다. 이종(異種)과 경계의 문화가 만나는 커피숍은 요즘 사진, 인문학, 콘서트, 강연회 공간으로 무한변신 중이다. 무엇보다 커피전문점이 종이책과 전자책 붐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출판계가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raphy@donga.com
#@뉴스룸#전승훈#커피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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