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중현]어머니가 장마철에 불을 땐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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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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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둑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요. 침착하게 식구들을 데리고 피난하시오. 나는 여러분이 짐을 다 옮길 때까지 기다릴 테니까 말이오.” 둑에 금이 가 피할 시간도 없이 강이 넘칠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이때 마을의 우파(右派)를 대표하는 돈 카밀로 신부가 먼저 강둑 위에 올라섰다.

때는 이탈리아 사회의 이념대립이 최고조에 달했던 1950년대 초. 북부 평야지대를 흐르는 포 강 유역에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큰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나도 함께 가겠소.” 돈 카밀로와 사사건건 대립하는 공산주의자 읍장 페포네도 따라 나섰다. 페포네는 주민들에게 “강둑은 끄떡없소. 피난할 준비를 하시오. 그동안 여기 서서 내가 한 말에 대해 책임진다는 걸 여러분한테 보여주겠소”라고 소리쳤다. 다음 날 저녁 강둑에 구멍이 뚫려 마을은 물에 잠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대피한 뒤였다.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소설 ‘신부님 시리즈’의 한 토막이다. 어릴 적 읽은 이야기 속 돈 카밀로와 페포네는 큰 위기를 맞은 지도자가 취해야 할 이상적 모습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이탈리아는 요즘 다시 큰물을 맞았다. 유럽연합(EU) 3위의 경제 규모인 나라가 그리스 스페인에 이어 다음 번 재정위기의 희생양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국가를 이끄는 마리오 몬티 총리의 비장함에서 돈 카밀로와 페포네를 떠올렸다.

그는 지난주 “이탈리아가 EU로부터 구제금융을 필요로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 뒤 앞으로 3년간 공공부문 지출을 260억 유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지난달 말에는 노동법을 40년 만에 고쳤다.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물러나겠다”며 자신의 신임을 걸었던 법안의 핵심은 평생고용 폐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 기업이 감원을 쉽게 할 수 있게 해 생산성을 높이고 투자 확대를 꾀하는 내용이다. 이 때문에 취임 초의 높았던 지지율은 하락했지만, 남유럽 경제위기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방만한 재정 운용과 낮은 생산성에 정면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도 이미 유럽 경제위기라는 장마의 영향권에 들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6일 외신기자들과 만나 “2008년 금융위기가 태풍과 일시적인 폭우라면 지금의 위기는 장기화, 상시화한 모습으로 지루한 장마와 비슷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도 대공황에 비견되는 이번 위기가 10여 년 지속될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당선되면 임기 내내 위기가 상수(常數)가 될 한국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여야 대통령 후보군의 슬로건, 출마선언문에서 경제위기에 대한 긴장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 각국의 용기 있는 지도자들이 내놓는 정책들과 달리 실체가 불명확한 ‘경제민주화’ 논쟁, 재정건전성에 부담을 주는 복지확대 논의로 귀중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소나기는 피하면 그만이지만 긴 장마 땐 비와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우리 어머니들은 장마가 한창일 때 진땀을 흘리며 군불을 때곤 했다. 방바닥에 찬 습기로 가족들이 밤잠을 설칠까 봐 걱정해서였다. 깊은 속마음을 모르고 더운 날 불을 땐다며 어머니에게 짜증을 부리던 기억이 난다.

표에는 도움이 안 돼도 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늘려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정책의 정합성을 높여 재정건전성을 지키겠다는 공약을 내놓을 대선 후보를 기다린다. 그런 이가 돈 카밀로, 페포네 같은 용기와 어머니가 군불을 때던 진득한 마음으로 국민이 ‘길고 깊은 경제위기’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지도자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장마철#이탈리아#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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