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유재동]강만수와 김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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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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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기자
유재동 경제부 기자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은 2005년에 출간한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1997년 외환위기 직전 한국호(號)의 침몰에 맞서 치열한 사투(死鬪)를 벌인 노력을 기록해 놨다. 당시 강 회장은 경제팀 수장(首長)부처인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차관이었고 그의 밑에서 외환정책을 담당한 주무 과장은 김석동 외화자금과장(현 금융위원장)이었다. 강 회장은 이렇게 썼다.

“나는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외화자금과장을 불러 환율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우리 경상수지는 심각했고 대외균형이 파괴돼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외국 은행엔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그 말밖엔 대안이 없었다.” 신규 차입이 막히고 외국 금융기관들은 자금 회수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정부 당국자로서 ‘불가피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98년 공직에서 물러난 강 회장은 10년 만인 2008년 재정부 장관으로 복귀했다.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이 임박한 그해 9월도 금융시장엔 위기론이 나돌았다. 일부 외신에선 “한국 단기외채 문제가 심각하다”는 식의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강 회장은 이번에도 “우리 외환시장은 다른 나라보다 안정돼 있다”며 맞섰다. 김 위원장 역시 2007년 재정경제부 차관 시절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며 낙관론을 폈다.

돌이켜보면 2007년과 2008년 낙관론은 그 자체로는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외화 유출을 줄이고 지나친 불안심리를 어느 정도 진정시키는 역할도 했다. 두 사람의 ‘거짓말’은 책임 있는 당국자로서 큰 경제위기를 두 번이나 치른 위기 대처 경험에서 나왔던 셈이다.

시장이 공포에 빠지면 정부는 일단 양호한 지표는 강조하고 불리한 정보는 애써 감추는 경향이 있다.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우리 정부는 내부적으론 다음 해 성장률 전망치를 마이너스로 잡았지만 한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강 회장은 저서에서 “한계기업이 은행을 찾아가 ‘우리가 가망이 없지만 떼일 셈 치고 돈 빌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한국은 세계 주요국 경제가 모두 뒷걸음친 2009년에도 소폭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는 선전(善戰)을 했다. ‘김석동 금융위’도 부실 저축은행 처리 등 각종 난제를 다루며 시장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최근 김 위원장은 유럽발(發) 세계 경제위기와 관련해 “대공황 이후 최대 충격”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강 회장은 한발 더 나가 “대공황 때보다 더 심각하다. 우리 경제는 점저(漸低·점진적으로 하락하는 상황)”라고 했다. 과거 시장 불안을 줄이기 위해 ‘비관론의 폐해’를 누구보다 강조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눈길을 끌었다.

‘강만수 김석동 발언’을 이해는 할 수 있다. 실제 유럽이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 이번 위기가 잘 수습될 것이라 누구도 자신하기 어렵다. 과거 큰 위기상황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사전 대처가 미흡했다”는 비난을 받았던 만큼 이번엔 제대로 경고해보자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모두 감안해도 두 사람의 발언은 너무 투박했다. 금융정책 책임자인 김 위원장은 말할 것도 없고, 강 회장도 한국 정부의 신용을 배경으로 해외에서 외화자금을 조달하는 국책은행 수장이다. 비슷한 내용의 경고를 하더라도 더 절제된 표현을 사용할 순 없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리가 높아지면 그만큼 입도 무거워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 기자 jarrett@donga.com
#@뉴스룸#유재동. 강만수#김석동#유럽 경제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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