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재현]흥남 화학공장 도면 구하려 죽음 무릅쓴 선배 과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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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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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한국화학연구원장
김재현 한국화학연구원장
모든 전쟁이 그렇듯 6·25전쟁에도 영화로 제작해도 될 만큼 가슴 뭉클한 사연들이 많다. 영화 속 전쟁 이야기에서는 대부분 군인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진정일 고려대 화학과 명예교수가 한국화학연구원 소식지를 통해 들려준 전쟁 속 주인공은 과학자들이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고 일방적으로 밀리던 국군은 낙동강 방어를 기점으로 연합군과 함께 일대반격을 시작한다. 그해 9월 서울 수복에 이어 평양 입성이 이루어진 10월 국방부 요청으로 과학자로 구성된 시찰단이 북한에 파견된다. 안동혁(전 상공부 장관), 전민제(전 대한화학회장) 등이 참여한 시찰단은 군함을 타고 부산, 원산, 함흥을 거쳐 흥남 화학공업단지를 찾는다. 북한에 도착한 이들은 끊임없이 들려오는 총성 속에서 전쟁으로 파괴된 정유공장, 아세트알데히드 생산공장, 증류탑을 샅샅이 사진 속에 담았다. 임무를 마친 11월 24일 함흥 연포비행장에서 이들은 귀환하는 군용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다. 다시 흥남으로 돌아갔다. 화학공장 설계도면까지 구해 남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11월 25일 일본 도쿄로 향하는 마지막 미군 비행기를 타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여의도에 착륙한 비행기 뒤쪽에는 북한군의 포탄 공격으로 구멍이 나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사지를 다시 찾아간 것은 조국의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속한 산업화만이 동포들이 잘 살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과학자의 눈으로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천연자원이 없는 나라는 원유를 이용한 석유화학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모든 산업에 원료와 소재를 공급하는 화학산업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피와 살이 된다는 것을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국화학회관 명예의 전당에는 흥남에서 일어났던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당시 북한에서 가져온 각종 공장사진, 상세도면, 원료흐름도 등이 전시돼 있다. 이들이 품었던 조국애와 목숨을 담보로 구해 온 소중한 자료는 대한민국 화학산업 발전의 초석이 됐다. 현재 우리나라 화학산업은 생산규모에서 세계 7위, 수출액 기준 우리나라 2위의 핵심산업으로 성장했다. 무역 1조 달러 시대를 만든 효자산업이며 지구촌 현안인 에너지, 환경문제를 해결할 녹색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북한과의 대치국면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글로벌 경제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세계 시장을 선점할 첨단기술력을 확보하려면 과학기술 투자와 더불어 청소년들이 과학자가 되는 꿈을 가져야 한다. 아쉽게도 요즘 청소년들은 경제 발전과 과학기술로 누리는 혜택에 어떤 희생이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사실과 고마움을 알아야 국가와 사회에 책임감을 갖는 인재로 클 수 있다. 총성 속에서도 미래 조국의 발전을 염원했던 과학자들의 이야기가 널리 전해질 수 있기를 기원한다.

김재현 한국화학연구원장
#기고#김재현#과학자#흥남 화학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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