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기홍]시간지체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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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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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작가 최인훈은 1994년 펴낸 역저 ‘화두’에서 인류를 커다란 공룡에 비유했다. 머리는 바야흐로 21세기를 넘보고 있는데, 꼬리 쪽은 아직도 19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진흙탕과 바위산 틈바구니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짓이겨지고 있는 그림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그림은 지금의 지구촌을 표현하는 데도 유효하다. 공룡의 머리는 최첨단 SNS 시대에 들어와 있는데 꼬리 쪽은 봉건 독재시대에 머물러 있다. 발전단계와 속도가 너무도 다른 시대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공룡의 꼬리가 올 한 해 심하게 요동쳤다. 봉건적 독재체제가 철옹성처럼 버티고 있던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의 민주혁명을 보면서 타임머신을 탄 듯한 기분이었다. 독재, 고문, 강제연행, 시위, 분신…. 1980년대 한국사회로의 시간여행이었던 것이다.

국제뉴스 에디터로서 그 같은 시간여행을 한 것은 행운이었다. 공룡의 몸부림 과정에서 스러져간 숱한 귀중한 생명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한발 한발 진전해가는 역사의 필연을 새삼 절감케 해주는 감격스러운 경험이었다.

중동의 격변은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한 일이었다. 수십 년 철권통치를 휘두르면서 국민의 생명을 파리 목숨 취급해온 독재자 대(對) 민주화를 염원하며 하나로 뭉친 시민들의 대립구도였다.

하지만 이젠 이들 나라도 선악의 구분, 좋은 쪽 나쁜 쪽을 선명히 나누기 힘든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종파 간, 정파 간 내부 갈등이 치열해질 것이고 독재에 맞서 하나로 뭉쳤던 사람들은 소속된 부족, 지역, 이념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손가락질할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이미 오래전에 거쳐 온 발전단계다. 우리 사회는 6월 민주항쟁을 분수령으로 선악이 맞서는 독재시대를 벗어나 서로의 이해관계, 관점의 차이가 맞부딪치는 상대적 가치의 시대로 진입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이 선악 대립구도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자신이 서 있는 쪽이 절대선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서 있는 이념적 정파적 입장의 대칭점에 있는 이들을 악으로 여긴다.

자신이 싫어하는 TV 채널에 출연한 연예인을 개념 없다고 단정해버리는 작가의 글은, 그의 정신세계가 여전히 선악이 명확했던 80년대에 머물러 있음을 엿보게 해준다.

FTA 통과를 놓고 “뼛속까지 친미” 운운하는 중견 판사의 글도, FTA를 80년대식 친미 반미의 스펙트럼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 글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자 “보수 편향적인 판사들 모두 사퇴해라. 나도 깨끗하게 물러나 주겠다”는 반응을 보인 또 다른 판사 역시 시대의 논점을 한참 잘못 짚었다. 작금의 논점은 FTA 찬성이냐 반대냐,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판사의 처신과 자세에 대한 것인 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게 놀랍다. 만약 첫 글을 올린 판사의 글이 야당 지도자를 겨냥해 “뼛속까지 반미 종북”이라는 내용이었다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좌든 우든 이념의 전사(戰士)를 자임하는 이들 가운데는 막상 격동의 시절에는 역사의 현장을 외면하다가 뒤늦게 현실참여형으로 변신한 경우가 적지 않다. 뒤늦게나마 관심을 가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시대의 사고방식에 갇히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공룡의 머리와 몸은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데 아직도 꼬리의 끝자락에 남아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현상을 ‘시간지체 증후군’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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