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철희]어디선가 남북 접촉 2라운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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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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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정치부 차장
이철희 정치부 차장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4일 동부 시베리아의 군사기지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핵물질 생산과 핵실험을 잠정 중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김정일은 남-북-러 가스관 연결사업에도 관심을 표시했다. 그의 발언에 얼마나 무게가 실려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답보 상태인 6자회담 재가동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김정일은 그동안 러시아를 통해 회심의 카드를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2000년에도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대통령에게 “미국이 인공위성을 대신 발사해주면 장거리미사일을 포기할 수 있다”는 협상안을 내비쳤다. 2002년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두 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사실 러시아는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개발에 나서게 한 원죄가 있는 나라다. 1990년 9월 한국과의 수교를 통보하기 위해 방북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교장관은 북한 측의 격렬한 언사에 치를 떨어야 했다. 북한은 소련의 배신행위를 비난하며 “우리가 희망하는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더는 얽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랬던 북한이 혈맹인 중국에는 깐깐하게 굴면서도 러시아에는 속내를 털어놓는 이유가 뭘까. 전문가들은 북한의 명줄을 쥔 중국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러시아는 이런 공포감을 완화하는 완충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북한은 석 달 전 김정일의 중국 방문에 이어 지난달 중국 창춘(長春)에서의 북-일 비밀접촉, 인도네시아 발리에서의 남북 비핵화 회담, 미국 뉴욕에서의 북-미 고위급 회담으로 이어지는 대외적 유화 행보를 계속해 왔다. 김정일은 이번에도 러시아라는 완충지대에서 국면전환의 계기를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남 행보도 주목된다. 북한은 ‘이명박 역도(逆徒)’라고 퍼부어왔던 대통령 실명 비방을 이달 5일을 기해 뚝 그쳤다. ‘이명박 역적패당’이라고 방송했던 부분을 ‘남조선 보수집권세력’으로 바꿔 재방송하기도 했다. 북한은 여전히 금강산의 남측 인력을 모두 쫓아내고 매년 그랬듯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을 맹비난하지만 아직까지 실명 비방을 재개하지는 않고 있다.

북한만의 변화는 아니다. 얼마 전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에 대해 “이전보다 달라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강경기조를 고수하던 통일부도 북한이 접수 의사도 밝히지 않은 수해지원 물품을 보내겠다며 50억 원 규모의 남북협력기금 집행을 의결했다. 또 서해에서 표류하다 남하한 북한 주민들을 하루 만에 신속하게 보냈다. 불과 몇 달 전 북한 주민 27명을 표류 50일 만에야 송환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최근 ‘미국 측 소식통’의 말을 빌려 북한이 북-미 회담에서 북-미 간 최고위급 당국자회담, 즉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했다고 전했다. 미국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미국은 “먼저 한국을 거쳐야 한다”고 답했을 공산이 크다. 북-미 회담도 남북 회담이라는 징검다리를 거쳐 성사됐듯이….

최근 남북 간의 묘한 기류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천안함, 연평도 사건의 해법 없이 남북관계 개선은 쉽지 않겠지만 모처럼 조성된 기류를 활용하는 대담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어디에선가 남북 비밀접촉 2라운드가 벌써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철희 정치부 차장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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