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기홍]토트넘과 워싱턴 사이

  • Array
  • 입력 2011년 8월 11일 03시 00분


코멘트
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아침 출근길. 서울 세종로 사거리 신호등 옆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편 가르는 나쁜 투표 거부’라고 쓰여 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거부하자는 단체에서 붙인 것이다.

기존의 선택적 무상급식이 정말로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를 편 갈랐을까? 지난해 봄 무상급식 논쟁이 한창일 때 많은 취재기자가 교실을 찾아가 교사들과 아이들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 대다수 아이들은 누가 무상급식 대상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일부에서 부주의한 교사와 엉성한 시스템으로 개인정보가 누출되는 경우가 있었는지 몰라도, 이는 시스템의 보완과 교사에 대한 교육으로 보완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에서 특파원 생활을 할 때 예방접종을 하러 보건소에 갔더니 대기실에 무상급식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부모가 보건소 등에서 신청하면 담임교사와 내 아이조차 모르게 무상급식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선택적 무상급식이 가난한 아이들을 낙인찍는다는 좌파진영의 선전은 우리 사회에서 무서운 파괴력을 발휘해 왔다. 유대인 학살을 주제로 만든 워싱턴의 홀로코스트박물관에서 나치의 집권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전율을 느꼈던 기억이 떠오른다. 독일인을 집단 광기에 빠뜨렸던 힘은 ‘거짓 디테일들’이었다. 자신들이 공격하려는 목표물을 악(惡)으로 형상화하는 다양한 거짓 팩트를 퍼뜨리는 게 나치의 선동선전술이었다.

무심히 지나칠 수 있었을 플래카드 앞에서 이런 상념에 빠진 것은 거짓 팩트에 영향을 받아 이 길 저 길 가봐도 괜찮을 만큼 우리의 상황이 여유롭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 국제뉴스의 주축을 이루는 영국 런던 토트넘 폭동과 미국의 재정 파탄은 우리 사회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양 극단의 낭떠러지다.

영국 폭동의 진원지인 토트넘은 저소득층 주거지다. 슬럼은 아니지만 밤늦게 마음 놓고 다닐 만한 곳은 아니다. 아프리카, 터키계 이민자 2, 3세가 많이 산다. 경찰이 차별한다는 피해의식도 크다. 폭도들은 가게에 침입해 물건을 훔치고 때려 부수고 있다. 청년들의 야만성에 불이 붙은 계기는 영국 보수당 정부의 긴축재정이다. 영국 정부는 재정지출을 2014년까지 25%나 줄일 계획이다. 복지지출 삭감액만도 180억 파운드(약 31조 원)에 이른다.

긴축재정의 칼날을 가장 격심하게 맞는 계층은 언제나 경제적 하위 계층이다. 흑인청년에 대한 토트넘 경찰의 총격은 20.4%에 달하는 청년실업률로 불만이 들끓던 젊은이들에겐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린 격이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재정지출 삭감 계획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난해 5월 총선에서 국민 다수가 택한 영국이 살아남기 위한 탈출구다. 나라를 빚더미에 올려놓은 복지잔치를 더 끌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재정적자를 줄이지 않을 경우 초래될 결과는 대서양 건너 미국발 경제위기가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보편적 복지라는 달콤한 구호만 외치며 무작정 달려갈 때 그 끝은 지금 그리스,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 일본 등이 맞닥뜨린 낭떠러지가 될 것이다. 그 낭떠러지 앞에까지 간 뒤에야 돌아서면 이미 늦는다는 것을 토트넘은 보여준다. 재정파탄 위기 앞에서 뒤늦게 방향을 돌려 긴축재정이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간 영국 정부의 선택은 폭동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취약계층을 외면한 채 오로지 재정 정상화만을 목표로 달려가면 그 끝 역시 낭떠러지다. 두 낭떠러지 사이의 넓지 않은 공간이 우리가 헤쳐 가야 할 길이 아닐까.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