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굴절된 정치자금의 역사 다 털고 가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1일 03시 00분


노태우 전 대통령이 6공화국 비사를 담은 회고록에서 1992년 14대 대선 때 김영삼(YS) 당시 민자당 후보 측에 3000억 원을 건넸다고 밝혔다. 그는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이원조 의원을 김 후보 측에 소개시켜 주고 이들을 통해 2000억 원을, 그 뒤 대선 막판에 김 후보 측의 긴급 지원 요청에 따라 직접 1000억 원을 지원했다”고 부연했다.

YS 측은 “노 전 대통령은 4, 5년 전부터 중증의 와병 상태인데 누가 썼다는 것이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비자금 사건으로 수감됐을 때 회고록을 직접 쓰면서 구술도 했다고 한다. 정치자금 관련 구술 내용은 모두 녹음돼 모처에 보관하고 있다. 회고록에는 노 전 대통령의 명예회복을 위한 내용이 많지만 자신을 구속시킨 YS에 대한 대응 또는 보복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14대 대선 당시 노 대통령이 막판에 민자당을 탈당했으나 여당 후보인 YS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넸을 것이라는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이번 회고록을 통해 그런 소문이 상당 부분 신빙성을 지니고 있음이 드러났다. YS 측이 노 전 대통령의 돈은 당에 내려온 것이라고 반박한다 해서 불법 정치자금 문제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YS는 대통령 취임 후인 1993년 3월 “재임 중 단 1전의 돈도 받지 않겠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이같이) 결심했다”고 말해 14대 대선 때 돈 선거가 이뤄졌음을 시사했다. 이제라도 YS가 금권(金權)정치의 어두웠던 한 시대를 밝히고 가는 것이 정도다.

회고록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대목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퇴임 후에도 갖고 있었던 것에 대해 “김영삼 당선자가 청와대에 오지 않아 후임자에게 자금을 전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지만 군색해 보인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20억 원+α 정치자금 수수설’ 관련 부분은 아예 빠져 있다. DJ는 자서전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서 20억 원 이외에 받은 것은 없다”며 수수 사실을 시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선언이 자신의 결단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작품’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치자금법 공소시효(3년)는 이미 끝나 사법적으로 진실을 가릴 수는 없게 됐다. 현직 대통령이 불법 정치자금을 여당 대선후보에게 지원했던 굴절된 역사를 그냥 덮고 가기보다는 관련자들이 고해성사 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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