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권력은 측근이, 재벌은 핏줄이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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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5일 19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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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논설위원
김순덕 논설위원
이제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을 순 없을 것 같다. ‘정(情)’으로 유명한 국민간식을 만들어온 오리온그룹의 담철곤 회장이 초코파이 포장재 등을 납품하는 위장계열사 아이팩의 회삿돈을 빼돌려 고급 외제차를 몇 대씩 굴린 혐의로 검찰에 소환될 처지가 됐다.

그것도 카레이싱 산업이나 선수를 키우려 ‘포르셰 카이엔’ 같은 스포츠카를 사거나 리스한 것도 아니고 자녀 통학용이었다니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 2002년 처음 그 차를 탔을 때 담 회장의 장남 서원 씨는 열두 살이었다.

지난달 말엔 서울중앙지법이 외제차를 몰다 남의 차를 들이받고 도망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차남 동원 씨에게 벌금 700만 원을 선고했다. 4년 전 유흥업소 종업원에게 폭행당했다고 아버지한테 일러 어퍼컷을 날리게 했고 그래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을 선고받게 만든 바로 그 아들이다.

법원에서 검찰이 구형한 250만 원보다 벌금 액수를 훨씬 높인 이유는 아마도 국민감정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대기업이 잘해서 나라가 성장하고 글로벌 위기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자랑스러워했던 사회분위기도 급속히 싸늘해지고 있다. 마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가 당직을 떠나면서 명언을 남겼다. “권력은 측근이 원수이고 재벌은 핏줄이 원수”라고.

탈법·비리가 反기업정서 불 질러

‘총수 일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기업경영, 세습의 공고화, 무분별한 계열 확대…재벌개혁 포기하면 경제위기 다시 온다.’

현 상황에 대한 경고 같지만 아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10년 전 내놓은 자료 중 한토막이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지 4년 뒤 나온 내용인데도 어쩌면 지금 경제현실과 이렇게 들어맞는지 신기할 정도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10대 재벌기업의 계열사는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 405개에서 2010년 617개로 52.2% 늘었다. 5일에 한 개꼴로 10대 기업 계열사가 불어난 거다. 지난주 동아일보는 삼성 현대 신세계 SK 금호아시아나 롯데 한진 등 6개 대기업이 1993∼2005년 1차 기업분할에 이어 최근 2, 3세에게 기업을 나눠주는 ‘2차 핵분열’이 활발하다고 보도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의 막차가 끊어지기 전에 서둘러 재산과 기업을 편법 상속해주려는 ‘터널링(Tunneling·땅굴 파서 길 만들기)’ 전략이다.

문제는 이 가운데 글로벌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업보다 해외브랜드를 들여오거나 그룹 내 납품으로 땅 짚고 헤엄치는 비즈니스가 상당수라는 점이다. 그것도 정보기술(IT) 서비스나 광고홍보 외식, 심지어 문구류 같은 업종에 비집고 들어가 중소기업을, 청년창업을, 기업가정신을 말라죽게 만들고 있다. 친(親)기업정책을 표방한 정부가 투자 많이 해서 성장과 고용을 높여달라고 2009년 출자총액제한 같은 규제를 풀어줬더니, “투자할 데가 없다”며 돈을 쌓아만 두던 오너들이 자녀들에게 비상장회사를 차려줘 돈을 긁어 담고 있는 형국이다.

그들이 잘나가는 것이 배 아파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같은 부(富)라 해도 노력과 실력으로 ‘벌어들인 재산’이면 사람들은 공정치 못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러나 ‘전관예우’가 우리를 분노케 하는 것처럼, 삼신할머니 랜덤(무작위) 덕에 은수저 물고 태어나 거저 돈버는 그들의 일탈적 행위는 국민의 반기업 정서에 불을 지른다. 더구나 대기업 사정에 밝은 국내 굴지 로펌의 한 변호사는 “대기업의 비상장 계열사에서 비자금이나 탈세, 뇌물 같은 부패가 나온다고 보면 틀림없다”고 장담을 했다. 고환율, 임금억제 같은 수출주도정책으로 소비자물가가 뛰어 국민은 앉아서 손해를 보는 판이다. 그런데도 재벌 2, 3세와 대기업 임직원들은 표 나게 돈질을 하니 “갈아엎는 게 낫겠다”는 역심이 안 생길 수 없다.

엄격한 처벌 있어야 공정사회다

어떤 사회에서든 이른바 사회지도층인 엘리트는 대중의 승인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사회에서 파워는 남들의 호감을 사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다”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지적했다. ‘초코파이 비리’ 같은 부도덕한 재벌이 판치는 사회에선 분배와 포퓰리즘이 정의(正義)로 보일 수 있다. 어쩌면 외환위기 같은 경제위기는 아니더라도 “노무현 정권은 차라리 자비로웠다”며 대기업들이 가슴을 칠 정치사회적 위기가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정부가 할 일은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겠다고 기존 정책을 뒤집는 게 아니다. 기업비리에 대한 일벌백계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이 지닌 ‘공정성 본능’은 불법·탈법자에 대한 단호한 처벌이 없으면 불온하게 끓어오르기 십상이다. 특히 권력의 측근과 관련된 기업비리라면 원수를 응징하듯 찍어내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시장경제도 위험해질 수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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