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백경학]오마니, 걱정마시라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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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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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꽃피는 5월이 돌아오면 2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3년 동안 췌장암으로 고생하신 어머니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백발의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흑단 같은 검은 머리에 화장을 곱게 하신 젊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처녀시절 청초하고 다소곳하셨다는 어머니는 세상 풍파를 겪으며 점점 사자처럼 억세고 강인한 ‘평안도 오마니’로 변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시집오신 뒤 얼마 되지 않아 북한 정권에 재산을 빼앗기고 옷가지 몇 개만 추린 채 목숨을 걸고 감행해야 했던 월남행(越南行)과 남한에 정착해 겨우 살 만하니까 터진 6·25전쟁, 그리고 겨울바람보다 매서웠던 부산 피란시절은 세상 물정 모르는 새댁이 감당하기에 벅찬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어머니는 위기 때마다 투혼을 발휘하셨다. 지금도 친지들을 만나면 ‘포탄 속에서도 우리 어머니 치맛자락만 붙잡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농담을 한다.

아버지마저 군대에 나가고 시부모와 올망졸망한 시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던 어머니의 부산 시절은 드라마틱한 한 편의 소설이었다. 모두가 가난할 수밖에 없었지만 삶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푸르게 젊었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시곤 했다.

“공산주의보다 무서운 게 쓰자주의”

어머니는 가끔 대학생인 큰누나와 고등학생 형, 초등학생 작은누나, 유치원에 다니던 나를 불러 모은 뒤 어려웠던 피란 시절을 강조하시며 우리 백씨 집안의 낭비벽을 한탄하셨다. 어머니는 세수할 때 비누를 세 번 이상 문지르지 않으셨고 비싼 치약 대신 늘 소금을 사용하셨다. 어머니는 구멍이 숭숭 뚫린 러닝셔츠와 아버지와 형이 입다 버린 팬티를 입고 계셔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당시 어머니가 지으신 우리 집 가훈은 무슨 재건대 구호처럼 ‘근검절약’과 ‘자력갱생’이었다.

가족보다 늘 친구와 술을 사랑하셨던 아버지와 어머니 표현에 의하면 ‘금보다 귀한’ 전깃불을 밤늦도록 켜놓은 채 도깨비처럼 뛰어다니는 우리 사남매는 어머니에게 다름 아닌 무절제와 낭비의 화신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공산주의가 무서워 북한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남한을 찾아왔는데 이곳에 공산주의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너희 아버지와 너희들 몸에 붙은 ‘쓰자주의’다”라고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택시를 타셨고 우리 사남매는 수돗물을 틀어놓은 채 세수를 하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킹콩처럼 가슴을 두드리시며 “백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쓰지 못해 안달이 나서 꿀단지를 손에 든 곰처럼 ‘닝금닝금’ 뛰는 습성이 있는데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고 비통해하셨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사남매가 대학을 나와 집칸이나 마련하고 편안히 살고 있고 아버지도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것은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하신 어머니 덕분이다.

이렇듯 검약을 삶의 미덕으로 실천하셨던 어머니에게도 호사스러운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개봉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당시 남대문시장에서 양품점을 하셨던 어머니는 새로운 영화가 들어온 날이면 일찌감치 가게 문을 닫고 시장골목에서 놀고 있는 나를 부르셨다. “경학아! 어디 있네. 이러단 늦갔다. 날래 오라우.” 그러면 나는 “오마니! 걱정마시라우요”라고 대답하며 쏜살같이 어머니께 달려가곤 했다.

늘 바쁜 아버지와 누이들 대신 어머니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갈 때면 내가 마치 어머니의 보호자가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했다. 그때 어머니 손에는 어김없이 동네 방앗간 이름이 찍힌 자주색 보자기가 들려 있었는데 그 용도가 다양했다. 유난히 눈물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문희, 남정임 같은 여주인공이 수난 받는 장면이 나오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다가 결국 보자기를 사용하셨다. 영화를 보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앞좌석을 발로 톡톡 차거나 몸을 비틀기 시작했는데 보자기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두 다리를 동여매거나 손을 팔걸이에 묶는 엉뚱한 용도로 사용됐다. 어머니와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영화 속의 두 주인공이 하얀 실루엣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신음을 내는 장면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먼저 난감한 표정을 지으신 뒤 어김없이 보자기를 내 얼굴에 씌우셨다. 내가 영화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신 어머니는 혼비백산해서 보자기를 내 얼굴에 다시 씌우려다 가끔 내 얼굴을 찌르거나 목을 누르기도 하셨다. 내 입에서는 과장된 비명과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어김없이 내 손에 그 당시 귀한 바나나나 눈깔사탕을 한 봉지 살 수 있는 10원을 쥐여주곤 하셨다.

영화 함께 보던 날이 어제 같은데…

지금도 가끔 어머니 손을 잡고 영화관을 가는 행복한 꿈을 꿀 때가 있는데 그날이 어제 인 듯 생생하다. “경학아, 어디 있네. 영화관 가게 날래 오라우” 하는 어머니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사랑하면서도 못내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뵙게 되면 추억과 회한을 담아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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