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신연수]카이로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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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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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수 산업부장
신연수 산업부장
바로 타흐리르 광장 북쪽이었다. 지금은 이집트 민주혁명의 성지(聖地)라 불리는 그곳. 꼭 한 달 전 나는 그 길을 공포에 휩싸여 달음질쳤다. 시위대나 군인 때문이 아니었다. 1월 중순은 아직 이집트에 시위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므로….

오후 5시쯤 분홍색 건물의 이집트박물관을 나와 길을 건너려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카이로의 길이 대부분 그렇듯 신호등도, 건널목도, 차선도 소용이 없었다.

속이고 바가지 씌우고

왕복 8차로는 돼 보이는 큰길에서 차들이 빵빵거리며 쉼 없이 달려들었다. 그 사이로 조금 틈이 보이면 뛰어야 했다. 외국인에겐 목숨을 건 모험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자동차와 그 많은 사람들이 뒤엉킨 혼돈 속에서도 사고가 난 걸 보지 못했다.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지하철역이었다. 기차가 도착하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지하철은 예고도 없이 중간에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앞에 있던 여자는 문에 끼일 뻔했다. 다음부터는 나도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문을 비집고 들어갔다.

다음 날 유명한 모스크 ‘이븐툴룬’을 갔다. 지도를 보며 찾는데 길가가 쓰레기 천지였다. 사원 앞에서 이슬람 전통 복장을 한 남자가 “여기”라며 손짓했다. 그는 “알라신을 위한 것”이라며 1인당 20£E(이집트파운드)씩 내라고 했다. 돈을 내고 들어가 보니 텅 빈 마당에 별 게 없어서 여기가 이븐툴룬 맞느냐고 물었다. 알고 봤더니 우리가 찾는 사원은 옆 건물이었다.

배가 고팠다. 여행안내 책에 나온 식당을 찾아가니 그동안 문을 닫았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주변 다른 식당을 둘러봤다. 컴컴하고 더러워서 들어갈 마음이 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식탁에 깨끗한 천이라도 한 장 깔려 있으면 들어갔을 텐데…. 망설이다 맥도널드에 들어갔다.

관광 수입이 국내총생산 대비 6%나 되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는 이랬다. 환전할 때 10달러나 20달러짜리는 슬쩍 숨겨놓고 안 바꿔주고, 택시로 5분 거리를 1시간 거리라며 바가지를 씌웠다.

한국 기업인들은 이집트 얘기가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많다. 이집트인과 비즈니스를 하다가 사기를 당하거나 뇌물 때문에 곤혹스러운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달라질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 시스템을 정비하고 소소한 범죄를 막는 것은 어쩌면 독재국가에서 더 쉬운 일이다. 한국에서 산이 푸르게 되고 새마을 운동이 일어난 것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혁명이 민주주의를 담보하진 못해

가장 큰 문제는 이집트 국민의 대다수가 가난하다는 점이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사이의 인과관계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같이 간다는 것이 세계적 경험이다. 한국에서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성공한 것은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두꺼운 중산층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최저생계비 이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기는 힘들다. 무바라크 이후의 이집트를 예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아랍권과 이스라엘, 미국 등 중동지역의 복잡한 국제관계는 미래에 대한 셈을 더욱 어렵게 한다. 이집트 국민들이 많이 아프지 않게, 너무 멀리 돌지 말고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루게 되길 바랄 뿐이다.

참, 이집트 여행은 어땠을까? 기원전 3000년 전 세워진 기자의 피라미드와 룩소르에 있는 왕의 무덤들, 카르나크 신전 등은 대단했다. 우리를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알로” “아이 러브 코리아” 하며 순진한 웃음을 짓던 사람들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이집트는 꼭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신연수 산업부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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