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장관석]“돈도 안되고…” 사랑니 뽑으려면 각서 쓰라는 치과

  • Array
  • 입력 2011년 1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대학 동창들과의 송년 술자리에서 평소 주당으로 소문난 친구가 술을 마시지 않아 그 이유를 물었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사랑니를 뽑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친구는 “사랑니 하나 뽑기 위해 치과만 4, 5곳을 들렀고, 가는 곳마다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 화가 났다”고 털어놨다.

좋은 취잿거리다 싶어 기자가 실제로 사랑니 발치 진료 행태를 취재한 결과 진료 거부로 불편을 겪었다는 사례를 수십 건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 병원 측에서 ‘수술 결과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요구한 사례도 많았다. 지난해 2월 서울 관악구의 한 치과를 들렀던 김모 씨(34)는 사랑니를 뽑기 위해 ‘법적 책임을 묻지 말라’는 각서까지 써야 했다. 간호사가 건넨 각서 마지막 부분에는 “본인은 이 수술 결과에 대해 어떠한 법적 책임도 묻지 않을 것임을 서약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서약을 했지만 왠지 꺼림칙해 다른 치과를 찾은 김 씨는 ‘예약이 밀려 있다’ ‘치아가 많이 누워 있는 사랑니 발치는 못하니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다섯 곳 모두에서 시술을 거부당했다.

김 씨는 이후 다시 몇 곳의 치과를 돌아다닌 끝에 ‘양심적인’ 치과의사를 만나 겨우 사랑니를 뽑을 수 있었다. 그는 이 병원에서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처음 들렀던 치과에서 관악구 치과의사들이 자주 들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34세의 매복사랑니 남자 환자가 왔는데 서약서를 거부하고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갔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는 것. 김 씨는 “나의 사랑니 상태가 심해 수술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 말을 듣고선 의사들이 인터넷에 나의 신상정보를 ‘블랙리스트’로 올려 돌려보고 아예 수술을 거부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를 서울 관악구보건소에 항의했고, 첫 번째 들렀던 치과 병원장이 나중에 자신에게 전화로 “잘못했다”며 사과했다고 전했다.

한 개인병원 치과의사는 “사랑니 발치는 상태에 따라 5만∼15만 원을 환자가 부담하지만 신경을 잘못 건드리면 출혈과다나 안면마비 등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다”며 “위험부담에 비해 돈이 안 돼 진료를 꺼리는 것이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환자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양심적인 치과의사가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큰돈이 되지 않는다고 진료나 수술을 거부하는 일부 의사들의 행위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랑니 발치를 하려고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거나 대학병원까지 가야 하는지 의문이다.

장관석 사회부 jk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