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유종호]‘괴짜’ 많아져야 세상은 풍성해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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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장을 주고받는 시점에 매스컴이 벌이는 공통의 의식(儀式)이 있다. 한 해 동안의 큰 사건을 선정 보도하고 화제를 모은 인물과 세상을 뜬 인물을 돌아본다. 그러는 한편 분야별 전문가의 예측을 보도한다. 한동안 점성술사의 발언까지 보도하더니 요새는 뜸해졌다. 이러한 공적 성격의 행사와 거리가 먼 사사로운 행사를 구상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문화적 대사건은 우선 노벨상과 관련된다. 톨스토이도 릴케도 조이스도 쿤데라도 못 탄 문학상을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벨상이 우리를 보는 타자 시각의 한 지표이며 국력의 반영이란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도 선전해서 모두 17명의 수상자를 낸 일본의 기록은 큰 사건이다. 정치색이 없는 편인 과학 분야에서 많은 수상자가 배출되었으니 착잡한 심정이다.

옛날처럼 ‘대국’ 행세를 하려 드는 중국과 특히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한참 앞서가는 일본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 처지가 걱정스럽다. 경제적 도약 이후 우리가 모든 분야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7명의 기록은 우리의 국력을 가리키며 냉혹한 자기성찰을 요구한다. 아시아 올림픽 2위는 물론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거기에 머물러 희희낙락할 처지가 아니다.

휴전 이후 상황 여전히 가혹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가혹하다. 휴전 이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 밑에서 살고 있다는 심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제 불발탄이 아니라 ‘국산’ 핵폭탄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 나이에 새삼 무섬을 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이 걱정스럽다는 얘기다. 17명을 배출한 나라의 어린 세대보다 한결 열악한 상황에 있지 않은가.

문단에서는 요즘 인터넷 소설이 큰 화제다.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여 장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독자를 갖게 되고 수입도 괜찮다니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디어는 메시지가 아닌가. 냉골에서 냉수 마시며 머리띠를 두른다고 좋은 문학이 나올 리 없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다. 천금(千金)이면 죽지 않고 백금(百金)이면 감옥살이 않는다는 말도 있다. 모두 자본주의가 대두하기 이전에 생긴 말이다. 작가도 먹고살아야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본래 점성술사였다. 그러나 천문 관측 과정에 지동설을 알게 되었고 그 바람에 천문학자가 되었다. 케플러는 유능한 천문학자였으나 점성술사가 되었다. 점성술사가 위세도 있고 수입도 좋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연재는 결과적으로 케플러의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는 젊은 세대에 애독자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다. 천문학자임을 포기하고 점성술사가 되어 돈방석에 앉아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2010년에 세상을 뜬 인물을 선정한다면 우선 6월에 일본에서 작고한 손창섭을 꼽겠다. 고속발전을 이룩한 사회일수록 건망증이 심하다. 1950년대 암울한 시대의 사회사를 담은 수작으로 많은 애독자를 모았던 그는 부인의 나라 일본으로 이주했다. 기독교 계통 이단적 종파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거리에서 전단을 나누어 주고 또 이따금 한국대사관 건물에 나타나 계단에서 통곡하기도 했다 한다.

그는 괴팍한 작가로 소문나 있었다. 누구에게도 주소를 알리지 않고 각별히 친한 이도 없었다. 그러나 냉소적인 작품 경향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대하는 태도만은 엄격했다. 그의 원고는 단 한 자의 오자도 없고 고친 흔적도 없이 정서되어 있었다. 글씨는 달필이면서도 단정했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 기행과 우국행동을 연출하여 광고효과를 내고 시장에서 실적을 올리는 것 같은 자가선전과 담을 쌓고 주변인으로 살다 갔다. 그 점에서 그는 예스러운 문학 순교자이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은 친구 귀띔으로 최근 알게 돼 찾아 읽으려는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라는 일인이다. 소련이 경제 시스템의 결함으로 붕괴한다는 취지의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란 책을 1980년도에 내서 알려지게 되었다. 학부 때 수학을, 미국에서 폴 새뮤얼슨 밑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귀국한 후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을 통합하는 거대이론 구성을 목표로 삼았다. TV나 전화도 없는 하숙에서 고정 수입 없이 연구에 전념하다 갔다는 것이다.

관행에 얽매여서는 발전 없어

에릭 홉스봄은 소련 붕괴를 예측하지 못한 점에 역사가로서의 자괴감을 표시했다. 20세기 말에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나라는 중국뿐이라고 말한 저널리스트가 유일하게 선견지명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를 비롯해 주도적 서구 지식인들이 중국 공산당 자체가 부정하게 되는 문화대혁명을 찬양해서 청년들을 오도한 비극적 사실을 감안할 때 고무로 같은 이는 주목받아 마땅하다.

손창섭, 고무로 같은 괴짜 작가나 학자가 많이 나와야 문학도 학문도 깊어질 것이다. 연구자들을 소규모 논문 작성에 매어두는 관행을 철폐하고 획기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노벨 과학상 수상의 가망은 없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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