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현진]태광과 신한, 차명계좌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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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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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했던 대로 그냥 밑에 시키던 것이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이어져 왔다.” 11일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차명(借名)계좌 개설에 관련된 혐의로 중징계 방침을 통보받은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내놓은 반응이다. 남의 이름을 빌려 금융거래를 하는 차명계좌 거래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불감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인식이 이 정도면 이런 관행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 있을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최근 불거진 태광그룹 비자금 의혹에도 어김없이 차명계좌가 자리 잡고 있다. 태광산업 지분의 33%가 차명으로 관리되어 왔다는 폭로와 명의를 도용당한 전 임직원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검찰 수사로 드러나겠지만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면 차명계좌를 이용한 금융 거래의 규모가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1997년 제정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금융실명제법)’에는 차명계좌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처벌할 규정이 없다. 대신 금융실명제법 준수 의무를 규정한 금융감독원 감독규정으로 금융회사 임직원이 차명계좌 개설을 직접 지시하거나 알고도 묵인했을 때 이를 제재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행 법 안에서는 금융회사와 이를 감시하는 금융감독 당국이 차명거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최전방에 서 있는 셈이다.

태광그룹의 사례만 봐도 그 많은 차명계좌를 만드는 동안 금융회사에서 과연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미국에서는 금융회사가 고객 정보를 철저히 확인하는 ‘KYC(Know Your Client) 룰’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있다. 은행 계좌 하나를 만들 때도 20여 개가 넘는 고객 정보를 요구하며, 자금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묻는 조항도 있다. 자금세탁방지법의 큰 테두리 안에서 자금의 실명거래를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금융회사들이 차명거래에 둔감한 것은 금융감독 당국의 ‘솜방망이 처벌’의 영향이 결정적이다. 금감원은 지난해 5월 신한은행 검사를 나갔을 때 이미 라 회장의 차명계좌 개설 정황을 파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검사반장은 신한은행 직원들에게 보낸 질의서에서 재일교포 등 고객 6명의 거래명세가 차명거래로 보인다는 점을 명시하고 경위 설명을 요구했으나 검사는 더 진척되지 않았다. 금감원 측은 “신한 직원들이 답변을 거부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금융회사 직원이 금융감독 당국의 답변서 제출 요구를 거부하는 것이나 이를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금감원을 바라보는 금융회사 임직원들의 생각은 어떨까. 금융감독 당국을 ‘종이호랑이’ 정도로 여길 게 분명하다. 금융감독 당국이 차명거래에 대해 그동안 엄정하게 칼을 들이댔다면 금융실명제법이 발효된 지 13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렇게 차명거래가 관행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파장은 고스란히 각종 비리 의혹으로 번지고 한국 사회의 투명도를 떨어뜨리고 있다.

최근 만난 한 금융권 고위 인사는 “신한은행 사태는 한국 금융권의 대외 신인도를 크게 훼손했다. 파고들어 가면 무감각하게 대해 온 차명계좌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음 달 11일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정부는 기초질서 사범 단속에까지 나서면서 국격(國格)을 높이는 작업에 다걸기하고 있다. 같은 시각 후진적인 차명거래는 아직도 은밀하게 횡행하고 있다. 겉만 달라진다고 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박현진 경제부 차장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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