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창혁]國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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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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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어서 그런가.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의 ‘쇼와사(昭和史)’를 읽다 쇼펜하우어의 독서론이 생각났다. ‘좋은 책을 읽기 위한 첫걸음은 나쁜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철인(哲人)들의 독서론이 많지만, 책읽기를 게을리 한 탓인지 유독 쇼펜하우어의 이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문예춘추’ 편집장과 대표를 지낸 한도 선생의 책은 분명 양서(良書)였다. ‘일본이 말하는 일본 제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감히 촌평을 하자면 역사에 대한 양식(良識)과 전쟁 시기 민중의 실존적 삶에 대한 애정이 잘 교직(交織)돼 있다.

한도 선생은 일본이 군국화로 치달은 기점을 만주사변(1931년)으로 잡았다. ‘세계최종전쟁론’이라는 군국의 전략에 따라 기획된 음모였기 때문이다. ‘세계최종전쟁론’은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하라 간지 중좌의 구상으로, 당시 ‘육군에는 이시하라가 있다’고 할 정도의 천재적인 군인이었다 한다.

‘이승만 국부론’ 주창자들

패전 직후, 한도 선생의 부친은 신문에 실린 어느 군인의 인터뷰 기사를 보다가 “군인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도 있군”이라고 감탄한다. “전쟁에 패한 이상 군은 깨끗하게 유종의 미를 거두어 군비를 철폐해야 한다. 이제 우리야말로 평화의 선진국이라고 자랑하면서 세계의 여론과 마주하고 싶다.” 바로 이시하라 인터뷰였다. 한도 선생은 책에서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는 그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일본을 이렇게 만든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썼다.

어느 나라, 어느 시기건 시류(時流)는 있게 마련이다. 시류를 따른다는 게 민초에겐 생존방식을 의미할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운 편승도 있다. 얼마 전부터 슬금슬금 고개를 들고 있는 ‘이승만 국부론(國父論)’도 내겐 그렇게 보인다. 건국 60주년과 보수우파정권의 출범이 겹친 게 안전판 역할을 한 걸까?

워싱턴 교민 1111명이 이승만기념관 건립을 위한 1달러 헌납 서명증서를 전달했다는 며칠 전 모 신문 기사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을 위하여…아름다운 1달러’라는 제목이 달렸다. 워싱턴 주 이승만기념사업회장은 “온 국민이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존경하는 미국처럼 건국대통령의 공을 높이 살 줄 아는 국가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했다. 인터넷엔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라는데…”라는 질문도 떠 있다.

우남(雩南·이승만의 아호)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필요하다. 필자만 해도 그에 대해선 ‘분열주의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전쟁지도자’로서 한국전쟁을 헤쳐나간 그의 리더십은 전쟁 후반기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이 “이승만은 아시아에서 장제스나 네루와 같은 대표적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큼 보기 드문 것이었다.

국민에 총부리 겨눈 과거를 아는지

그렇다 해도 우남이 이희승 국어대사전의 풀이처럼 ‘조지 워싱턴이나 중국의 쑨원(孫文)처럼 국민의 숭앙을 받는’ 국부가 될 순 없다. 무엇보다 그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폭도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제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는 ‘민주공화국의 국부’는 없다. 워싱턴은 1792년 첫 번째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려 했다. 국민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진 못했지만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는 아예 정계를 은퇴했다. 권력자가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 시대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메리칸 민주주의’의 신봉자인 우남이 독재자로 국민들에게 쫓겨나기 150년도 더 이전의 얘기다.

그야말로 한 줌도 안 되는 ‘이승만 국부론’을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시류에 이데올로기까지 버무려 과거를 세탁하고,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군상(群像)이 있는 한 ‘이승만 국부론’은 간단없이 튀어나올 것이다.

걱정이다.

김창혁 교육복지부장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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