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전자책, 그 새로운 출발

동아일보 입력 2010-09-13 03:00수정 2010-09-13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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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숭동 문예진흥원 강당에 모인 작가들의 표정은 긴장과 결연함으로 가득했다. 10년 전인 2000년 6월이었다. “전자책은 물류비용과 종잇값이 들지 않으니 50%의 인세를 지급해야 한다.” “전자책의 특정 업체 독점권은 1년만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졌다. 같은 시기 한 작가는 “5년 이내 전자책이 (책 시장의) 60∼70%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오늘 한국에서 전자책의 위상은 딱하다. 국내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인 황석영 씨의 작품도 교보문고 전자책 코너에서는 만화 콘텐츠 정도만 검색된다. 인터파크 도서에서도 차트 상위 작품들은 무료로 제공되는 이육사 한용운 등의 근대 문학작품이다. 그래도 변화의 바람은 다시 불고 있다. 박범신 씨의 소설 ‘은교’는 4월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동시 출간됐다. 교보문고는 최근 직원들이 책을 읽고 학습하는 ‘북마일리지’ 제도를 전자책 중심으로 재편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새로운 기류는 하드웨어의 변화에서 비롯된다. 책만 읽기 위해 단말기를 장만하겠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스마트폰의 보급과 ‘아이패드’를 선두로 한 태블릿 PC의 등장은 컴퓨터를 휴대기기화한 모바일 컴퓨팅 시대를 열고 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전자책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기가 손에 쥐이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반짝하다 잊혔던 3D 영화가 새로운 영상환경 속에서 부활한 것처럼, 전자책도 적합한 외부의 틀이 갖춰진 오늘날 재발견의 기회를 맞은 듯하다.

물론 변화는 질문들을 동반한다. 그 하나. 서권향(書卷香·책의 향기)이란 콘텐츠의 품격을 나타내는 비유이지만 책의 물성(物性)이 주는 친근함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물성을 잃어버린 전자책이 종이책과 다름없는 기쁨을 줄 것인가. 이런 논의는 의미 없을 수도 있다. 오늘날 LP와 MP3가 공존하듯 종이책은 많은 점에서 전자책을 능가하는 편의성을 제공하며 변함없는 가치를 자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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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질문은 ‘멀티미디어 기기 환경에서 사용자들이 전자책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것이다.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을 든 사용자들은 동영상 콘텐츠나 인터넷 검색,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에 들이는 시간과 독서에 쓰는 시간을 나눠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걱정하기는 이르다. 문자가 가진 미덕은 이 같은 경쟁 속에서 아직 충분히 재발견되지 않았다. 책은 빠르게도, 느리게도 읽을 수 있다. 사용자가 시간을 능동적으로 지배한다는 특성은 실제 사용 환경에서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 된다. 시청각의 디테일이 강제되는 동영상과 달리 상상과 우의(寓意), 수용자의 고유한 경험이 발현되는 문자 텍스트는 생각이 텍스트에 못 박히지 않고 오히려 텍스트를 풍요하게 한다.

어쩌면 새로운 전자책 환경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텍스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문자와 동영상, 하이퍼링크가 혼합된 ‘하이퍼텍스트’는 오늘날 ‘다기능 브로슈어’ 정도의 취급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풍부한 시청각 정보를 제공하면서 사용자의 능동성을 보장하는 이 같은 텍스트가 새롭게 발견되고 나아가 예술적 창작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 예찬자들도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이런 새로운 텍스트를 환영해도 좋지 않을까. 그것이 인간을 종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사고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며 그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것이라면.

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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