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하태원]미국인의 오너십과 FTA 감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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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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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은 미국의 민권 시민운동에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된다. 47년 전인 1963년 이날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 계단에서 이른바 ‘내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했다. 인종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흑인도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겨우 10분 동안 이어진 연설이었지만 그 울림은 아직도 생생하다. 미국의 민권 시민운동 단체들은 매년 이날을 기념해 대대적인 집회를 연다. 올해도 킹 목사를 추종하는 시민단체들은 자발적 모금으로 만든 킹 목사의 동상 제막식을 갖는 한편 워싱턴 시내에서 여전히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수민족의 권익보호를 촉구하는 행진도 벌였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정작 킹 목사가 연설을 했던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 계단에서는 이른바 ‘미국의 명예회복’을 주제로 한 보수진영의 집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인물은 보수적 시각의 대변자를 자임하는 폭스뉴스의 토크쇼 진행자 글렌 벡 씨. 2008년 대선 때 공화당 부통령후보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도 참석해 10만 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보수운동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른 ‘티파티 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인물이다.

진보진영은 발끈했다.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를 겨냥해 “인종주의자”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벡 씨가 신성한 날에 신성한 장소를 침범했다는 것. 해마다 광복절이면 진보와 보수 진영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과 세종로 사거리에서 제각기 행사를 벌이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은 미국인이 흔히 말하는 ‘오너십(ownership·소유권)’ 침해분쟁의 한 단면이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양대 현안으로 꼽히는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에서도 오너십 침해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한미 FTA 비준 절차를 담당하는 상임위원회인 상원 재무위원장 맥스 보커스 의원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상원의원 100명 중 99명이 찬성한다 해도 청문회 자체를 보류해 FTA 논의를 저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재무위원장이다. 그는 “나쁜 협정을 비준하기보다는 차라리 협정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쇠고기의 주산지인 몬태나 주 출신인 그의 반대는 이미 상당수의 미 쇠고기 업계가 현재의 미국산 쇠고기의 한국 내 판매량 증가에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 보면 몽니에 가깝다. 평소 기자와 가깝게 지내는 의회 소식통은 “한미 FTA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될 때 자동차 문제만 거론되고 쇠고기 문제가 부차적으로 취급되면 보커스 의원은 버럭 화를 내곤 한다”며 “한미 FTA 문제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오너십이 침해됐다는 피해의식”이라고 말했다.

3월 앨라배마 주에서 시작한 한덕수 주미 한국대사의 FTA 세일즈 투어가 한창이다. 뉴욕→메릴랜드→텍사스→오하이오→일리노이→미시간 주를 거쳤고 이달 말에는 워싱턴 주와 캘리포니아 주로 간다. 미국 재계협회가 동행하고 있고 지역 상공인들은 물론 정치인들과 면담을 통해 FTA 찬성 여론몰이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 미국 의회 관계자에게 오너십 침해로 화를 내는 사람을 달래는 법에 대해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일종의 자존심이다. 공개적으로 그걸 치켜세워 주면 된다”고 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정권이 통째로 흔들리는 경험을 했던 현 정권과 FTA 협상팀이 반대자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도 협상을 타결짓는 묘수(妙手)를 발견할 수 있을까.

하태원 워싱턴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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