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정인]‘한국의 마이클 샌델’은 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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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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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와 강연이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그의 화두가 지금의 우리 사회에서 이례적인 관심을 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많겠지만 그에 앞서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입시지옥에 독창적 사고능력 저하

세계적인 기업도 있고 운동선수나 예술가도 있고 자연과학자도 있는데 우리는 왜 정치나 사회 철학 분야에서는 푸코, 데리다, 하버마스, 해나 아렌트, 존 롤스, 샌델과 같은 뛰어난 학자를 키워내지 못하는가? 외국의 뛰어난 학자의 논의에 열광하기에 앞서 이제는 훌륭한 인문사회 과학자를 키워내기 위한 장기적인 대책과 단기적인 처방을 고심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샌델 교수와 나이도 비슷하고 또 같은 정치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필자가 느끼는 문제의식이다.

인문사회분야든 이공분야든 세계적인 학자가 드문 이유로 무엇보다 세계 최고인 우리 국민의 대학 진학 열기, 그리고 그것이 왜곡하는 대학입시 제도를 꼽을 수 있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려고 주입식 반복교육에 매달려 수능이나 내신 점수를 올리는 데 집중해야 하는 우리 학생들과 달리, 서구의 뛰어난 학자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하고 인간과 사회와 세계에 대해 독창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도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중등학교의 교육체계를 바꾸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점은 명문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회에서 ‘루저’가 되지 않고 떳떳하게 살도록 고용과 복지를 포함한 광범위한 사회문화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일이다. 이런 장기적인 대책을 통해 중등교육의 분위기를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이공분야보다 낙후된 한국 인문사회분야의 고등교육을 끌어올리기 위해 가칭 ‘인문사회판 KAIST’를 건립하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KAIST는 고급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연구중심의 이공계 대학원으로 출범했다. 그동안 경제개발에 기여함은 물론 과학기술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인문사회판 KAIST는 국내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선도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제한된 경쟁 속에 안주하면서 주로 자기 대학 출신을 교수로 충원하는 명문대학에 대한 개혁의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먼저 인문사회판 KAIST는 외국 유명 대학의 교수를 자유롭게 충원·초빙하여 국내의 유능한 대학원생을 교육하게 함으로써 서구의 명문 대학원과 같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경제력 등을 이유로 해외유학을 갈 수 없는 유능한 인재를 경쟁력 있는 국내박사로 키울 수 있다. 나아가 해외 학자와 국내 학자가 한국사회의 주요 문제에 대한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하게 함으로써 연구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인문사회판 KAIST’ 건립 제안

과학기술 분야와 달리 인문사회 분야는 나라마다 역사와 전통이 다양하고 발전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인 문제라 할지라도 서구의 문제의식이나 처방이 한국에 그대로 통용되지 않는다. 또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고유하고 특수한 문제가 우리의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학문의 대외의존성을 약화시키고 자생적인 인문사회과학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 수학의 정체성’이라는 용어는 우스꽝스럽게 들리더라도, ‘한국 정치학의 정체성’이라는 말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문사회판 KAIST는 국가의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발전을 앞당기고, 또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보편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강정인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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