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유종호]특성화된 번역 전집을 바라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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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번역문학의 문화적 위상은 높지 않다.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한 사정이라 생각되지만 가령 이웃 일본과 비교해 보면 사뭇 떨어진다. 지난날 역관이 중인층에서 충원된 문화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 외국문학이 소개되기 시작한 1920년대 초기에 번역이 주로 일본어 중역이고 또 초역(抄譯)이 많았다는 사정과도 연관될 것이다.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가 톨스토이의 희곡 ‘산송장’을 번역했고 ‘봉숭아’와 ‘고향의 봄’의 작곡가 홍난파는 시엔키에비치의 ‘쿠오바디스’를 번역했는데 모두 중역이자 축약된 초역이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번역문학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1921년에 나온 김억의 역시집 ‘오뇌의 무도’는 중역이지만 우리 근대시 형성에 막강한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한국시의 형태는 이 시집에서 유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근대시에 많은 3행 혹은 4행으로 된 연(聯)의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또 이 역시집이 준 문화적 충격은 당대 시인들이 남긴 글이나 회고담 속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나라의 문학에서나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번역은 형성적인 기여를 하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서 번역문학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것은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는 10년간이었다. 이때 국내 유수한 출판사들이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해서 많은 소설번역이 나왔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야심적인 기획이었고 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0, 80년대에 등장한 많은 작가가 이때 나온 번역을 통해 문학수업을 하였다. 또 중역이 사라지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우수한 번역, 창작 이상 큰 기여

최근 우리 출판계에서는 외국소설 번역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 유수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이 독자의 호응을 널리 얻으면서 여러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고전과 현대소설의 번역을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유럽 및 미국 중심의 작품 선정도 크게 수정되었다. 이러한 경쟁적인 출판은 양질의 번역과 독자적인 작품 선택을 낳아 결과적으로 번역문학의 지평 확대나 질적 향상에 기여하리라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대폭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말로 된 번역문학은 궁극적으로 우리 문학이다. 그것은 조선조의 ‘두시언해’가 우리 문학이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번역은 단순히 외국문학을 옮겨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구실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력하고 낯선 충격을 가해서 우리말에 새로운 가능성과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수한 번역은 창작 이상으로 모국어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외국문학에 독자를 빼앗긴다며 번역문학의 융성에 의구심을 표명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볼 때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1930년대에 일본에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와나미(巖波)문고가 일본문학의 적”이라고 공언한 적이 있다. 작가들의 호응을 얻은 발언이었다. 이와나미 문고를 통해 외국작품이 많이 읽히는 바람에 일본문학이 소홀히 돼 읽히지 않고 그 결과 일본문학을 빈약하게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뒷날 그것은 기우이자 오산이었음이 드러났다. 외국고전을 접한 많은 독자가 문학애호가가 되어 일본문학의 애독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계몽된 독자들의 등장이 뒷날 일본작가가 노벨상을 타게 되는 데 튼실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지금과 같이 외국문학을 총망라한 나열식 문학전집이 아니고 출판사마다 특성화된 고유의 브랜드를 개발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특성화되지 않은 전집을 통한 경쟁은 중복으로 서로 상처를 주기 쉽다. 얼마 전 방대한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기획 출판한 출판사가 있었다. 또 불문학자 김화영 교수의 손으로 알베르 카뮈 전집이 완간된 바 있다. 모두 출판사의 집념이나 역자의 헌신적 노력이 낳은 빛나는 결과였다. 이렇듯 작가 중심의 전집이나 선집을 내는 것도 특성화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허명무실한 이른바 잘나가는 베스트셀러만을 출판하는 일부의 관행을 극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베스트셀러 쏠림현상 극복의 길

글로벌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언어를 익혀 책을 읽도록 해야지 우리말로 된 번역문학의 융성에 기대를 거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1외국어 독해능력의 소유자가 아무리 늘어나도 번역문학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어로 된 문학은 언제나 필요하고 수요 또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더욱 열광적인 다수 관객과 응원 열기를 끌어 모은 월드컵 경기가 보여주듯이 민족과 민족주의는 인류의 현 발전단계에선 그 누구도 얕볼 수 없는 격정과 열기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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