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일본의 A2, 한국의 A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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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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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2에서 A1으로 한 단계 올린 것은 한국 경제의 회복세에 탄력이 붙을 희소식이다.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새삼 부각된 와중에 날아온 낭보라는 점도 의미가 크다. 정부 관계자들은 “집요한 설득 노력이 주효한 결과”라고 흐뭇해한다. 단순히 평가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때로는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신용등급을 올려야 할 이유를 주지시켰다는 것이다. 평가를 받는 쪽이 평가하는 쪽을 상대로 언쟁을 벌였다니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국가신용등급은 은행이나 공기업들이 외화를 조달할 때 기본금리 수준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명함을 내미는 것 자체가 힘들어진다. 무디스 같은 메이저 신용평가회사들이 ‘갑’으로 군림하는 이유다. 각국 정부마다 등급표에 불만이 있어도 여간해서는 따지지 못하는 건 신용평가회사들이 이미 ‘권력’이 돼 있기 때문이다. 자칫 심기를 거슬렀다가 박한 점수를 받기라도 하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 한국은 외환위기 때 한 번에 몇 등급씩 추락하는 고통을 겪었던 터라 더 조심스럽다.

무디스에 맞섰다가 본전도 못 건진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이다. 2002년 5월 무디스는 일본의 등급을 두 단계 낮춰 A2로 떨어뜨렸다. 세계 2위 경제대국이라는 자존심이 상처를 입은 판에 하필 바로 윗등급에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보츠와나가 배치된 것이 일본 정부를 자극했다. 보츠와나는 국토의 절반이 사막으로 에이즈 감염이 심각해 일본으로부터 가장 많은 원조를 받는 나라다. 일본의 경제산업상은 “인구 절반이 에이즈에 걸린 나라보다 낮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분개했고 일본 정부는 항의서한을 보냈다. “국가등급이 서방의 시각으로 결정되는 모순을 바로잡겠다”며 자국 회사를 대항세력으로 키워 독자적으로 평가에 나설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바뀐 것은 없었다. 세계 신용평가시장은 여전히 3대 메이저 업체가 장악하고 있다. 무디스는 5년이 지난 2007년에야 선심 쓰듯 일본의 신용등급을 한 등급 올려줬다.

국가신용등급을 결정하는 잣대는 여러 개가 있지만 핵심은 그 나라가 빌려간 돈을 갚을 가능성, 뒤집어 표현하면 부도가 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다. 경제성장률, 외환보유액, 단기외채 비중 등을 따지지만 이런 지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재정 건전성이다. 무디스와 작심하고 맞붙었던 일본은 정부 빚의 비중이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다는 사실에 발목이 잡혔다.

한국은 12년 5개월 만에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되찾았지만 세계 10위권 경제강국 위상에 비해서는 초라한 등급이다. 재정위기를 겪는 남유럽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국가 중 그리스보다는 한 단계 높아졌지만 다른 세 나라보다는 두 등급 이상 낮다.

한국의 국가채무는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공기업 부채처럼 공식통계에 잡히지 않는 ‘그림자 부채’까지 합하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고 봐야 한다. “PIGS보다 한국이 낮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진 것이 이번엔 먹혀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 살림에 계속 구멍이 생기고 곳간이 바닥을 드러낸다면? 무디스와의 다음번 협상에선 언성을 높였다가 역공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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