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대학자율 배제한 ‘사교육 사정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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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9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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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딸아이가 요즘 우편함을 자주 뒤진다. 합격통보를 기다리는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합격 여부는 편지봉투만 봐도 안다. 봉투가 얇으면 불합격이다. 합격이면 학교 안내서와 기숙사 신청서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봉투가 두툼하다. 입학경쟁률이 높은 대학에서 얇은 봉투가 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점수로 보아 합격권으로 예측했던 대학으로부터 거절 편지를 받을 때는 놀라게 된다. 반대로 기대하지 않았던 대학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예측 불허다.

한국은 무늬만 입학사정관제

미국 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할 때 SAT 점수 말고도 체육 연극 활동, 사회봉사, 남다른 체험, 에세이, 교사 추천서 같은 다양한 전형자료를 활용한다. 대학들이 어디에 가중치를 두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미국 대학들도 우수한 자원을 뽑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우수한가를 가려내는 방법론이 우리와 크게 다르다. 오랜 연구와 축적된 경험을 통해 학생의 윤리의식이나 리더십 같은 소위 ‘비인지적(非認知的) 능력’에 대한 평가기법을 발달시켜온 것이다.

이런 식의 입학사정관제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미국도 1920년대까지는 학업수행능력, 즉 SAT 성적 위주로 학생을 뽑았다. 그 결과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의 입학비율이 급증해 대학들이 중시하는 가치인 인종 국적 계층의 다양성에 문제가 제기됐다. 이런 폐단을 바로잡고자 1922년 아이비리그인 다트머스대가 학업성적은 조금 떨어져도 잠재력과 창의력이 있는 학생을 선발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것이 다른 대학들로 확산돼 입학사정관제로 정착됐다.

이명박 정부가 입시에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한 배경은 미국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점수뿐 아니라 잠재력과 창의력을 평가해 학생을 선발한다는 취지는 좋지만 대학 자체의 필요가 아니라 사교육 억제를 위한 정부의 요구에 의해 강요되고 있다. 더 아쉬운 것은 학생을 평가하는 대학만의 철학과 관점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무슨 기준으로 학생의 능력과 인성을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어 보인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가 만들었다는 ‘입학사정관제 운영 공통기준’에 따르면 사교육 의존 가능성이 높은 체험활동은 전형요소로 반영하지 않는다. 사교육을 유발할 수 있는 토익 토플 텝스 일본어능력시험(JLPT) 중국어능력시험(HSK) 등 공인어학시험 성적이나 교과 관련 교외 수상실적, 구술 영어 면접과 해외봉사활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무엇으로 뽑을지 고민 없어

입시에 반영하면 부작용이 클 수 있는 해외봉사활동이나 토익성적 같은 항목을 입시에 반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무엇을 전형에 반영하고 무엇을 반영하지 않을지는 전적으로 해당 대학이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옳다. 연구중심 대학도 있고, 취업에 강한 대학도 있을 터인데 똑같은 기준으로 학생을 뽑을 수는 없다. 공통기준에 따라 학생을 뽑을 거면 번거롭게 입학사정관제를 시행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학생부에 이것도 저것도 기록할 수 없다 보니 요즘 고등학교에선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반장선거가 치열해졌고 동아리 가입 경쟁률도 높다. 대학생들은 취업준비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 동아리를 외면하는 반면 고교생들은 학생부 기록을 남기기 위해 동아리에 들려고 기를 쓴다. 교내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토익과 경시대회가 사라진 자리에 반장선거와 동아리가 들어오는 모습이 왠지 씁쓸하다. 대학이 시류에 따라 흔들리다 보면 학생들은 우왕좌왕하게 되고 학부모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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