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방송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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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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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방송사들의 최대 관심사는 월드컵 중계권이다. 방송사 사장들은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논의할 때는 꼭 모인다. 그러나 논의 결과는 신통찮다. 방송사들의 견해차가 워낙 커 ‘공동중계를 위해 노력한다’는 원론적인 결과만 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방송사들이 신경을 쓰는 또 다른 이슈가 있다. ‘막말 방송’ ‘저질 드라마’로 대변되는 언어폭력과 선정성 문제다. 최근 방송사 사장들이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주재로 모인 자리에서 “세계 어디서도 우리만큼 막말 방송이 심한 곳은 없다” “막말 방송으로 지적받는 드라마는 앞당겨 종영하겠다” 등 자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합의 내용은 기대 이하였다. 방송사들은 제작진 교육을 강화하기로 했다.

막말 방송의 심각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방송사들의 움직임은 소극적이다. 방송사 처지에서는 막말 방송, 저질 드라마가 화제를 낳고 시청률이 높기 때문이다. 막말, 저질의 기준이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규제를 강화하면 창의성과 자율성을 잃게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방송사들의 태도는 최근 글로벌 방송 경쟁이 ‘품격’의 경쟁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선진국 방송들은 보도의 공정성과 정확성을 기하는 데 관심을 쏟아왔다. 그러나 추세는 변하고 있다. 오락 프로그램에서 선정성 폭력성을 낮추고 언어를 순화하는 것으로 관심사는 옮아가고 있다.

2년 전 공영방송의 모델인 영국 BBC는 큰 위기에 휩싸였다. ‘삭스 게이트’라고 불리는 막말 방송 논란 때문이었다. BBC라디오의 인기 오락 토크 프로그램 진행자가 앤드루 삭스라는 원로배우에게 장난 전화를 걸어 선정적이고 모욕적인 내용의 통화를 한 것이 방송됐다. 2만여 건의 항의 전화가 쏟아졌다.

BBC는 ‘오락 프로그램이 단지 웃기기 위해 모욕을 주거나 거슬리는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방침을 분명히 밝히고 강력한 막말 규제방안을 내놓았다. 오후 9시에 시작하는 성인 시간대 프로그램에 나오는 욕설, 비속어 등은 감사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오후 9시 이전에 나오는 욕설, 비속어 등은 효과음을 넣어 소리를 완전히 지우도록 했다.

또 시청자를 대상으로 방송에서 문제가 되는 막말의 범위를 묻는 여론조사를 했다. 막말 방송 퇴치에 국민이 직접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BBC는 막말 방송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담은 편집 가이드라인 수정판을 올 6월 발표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방송 규제에 소극적이지만 막말 문제에서만큼은 강한 태도를 보인다. 2006년 ‘방송품격시행법(BDEA)’이 통과되면서 모욕적이고 상대비하적인 발언을 한 방송사에 대해서는 벌금을 종전보다 10배 이상 올렸다. 최근에는 3회 이상 막말 규제를 어기는 방송사에 대해 삼진아웃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방송이 다른 매체보다 엄격하게 언어폭력이나 선정성 기준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방송의 영향력은 크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허용된 막말은 일상생활에서도 허용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 대법원은 방송이 표현의 자유를 가장 제한적으로 보장받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은 변한다. 방송은 가치관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고 선도한다. 그러나 가치관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방송이 넘어서는 안 될 경계는 있다. 그것은 사회의 품격을 가르는 경계다.

정미경 문화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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